한국은 전세계 몇 안 되는 불모지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속 미국에서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인 시리즈의 한국 성적은 늘 초라하기 짝이 없다. 같은 할리우드 시리즈 영화지만 4월24일 개봉한 (이하 )의 흥행 속도는 ‘이번에도’ 심상치 않다. 고작 개봉 닷새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했으니 대흥행의 척도인 ‘천만 영화’ 대열에 무난히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불가능하거나 유치하거나, 그들의 유니버스전세계가 사랑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마블 영화 속 세계관) 영화지만 한국인들의 지대한 사랑은 충분히 독특한 현상으로 보일 만하다. 천만 관객을 훌쩍 넘은 이 역대 외화 흥행 2위와 3위에 오른 것은 물론, 관객 700만 명 이상인 MCU 영화도 4편이나 더 있다. 해마다 4월 극장 비수기 때 개봉해 효자 노릇을 한 지도 오래다. 상황이 이러니 마블은 영화 개봉 때마다 배우들의 내한 행사를 주도하고, 보통 수요일에 새 영화를 상영하는 한국 스케줄에 십분 부응해 ‘전세계 최초 개봉’이라는 타이틀까지 부여한다.
은 지난해 4월 개봉한 와 2부작을 이루는 작품 중 후편에 해당한다. 2008년 을 시작으로 11년간 이어온 MCU의 22번째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22편 영화와 TV 드라마, 단편영화 등으로 구축한 MCU라는 ‘대안 세계’(Alternative Universe)의 거대한 한 분기를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그간의 관심을 모조리 환기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3시간 넘는 상영시간조차 거리낄 게 없다. 월차를 내서라도 극장을 찾아가 즐기겠다는 관객의 열정은 지난 11년간 일궈낸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겠다는 달뜬 심정으로도 읽힌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성공이 담보된 싱거운 흥행처럼 보일지 몰라도, 마블엔터테인먼트의 대안 세계 전략을 눈여겨본 이에게는 이 지점에 다다르기 위해 쌓아온 역사와 그것이 가장 극대화된 현시점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MCU의 전략은 다른 시리즈 영화와는 ‘선’을 긋는 것이다. 이전 할리우드 영화들이 전작의 성공을 바탕으로 속편 에피소드를 덧붙이는 방식을 고수했다면, MCU는 하나의 세계 안에 슈퍼히어로 캐릭터는 물론 불가해한 초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생경한 세계까지 포섭했다. 얼핏 불가능한 구상이나 유치한 발상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기계공학의 정수인 아이언맨, 마법이 근간을 이루는 토르의 아스가르드 왕국, 심지어 별난 외계인 해결사들이 벌이는 우주 활극이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할 수 없을 테니.
이것이 가능하도록 마블은 ‘크리에이티브 위원회’라는 부서를 만들어 MCU의 모든 이야기를 총괄하도록 했다. 장기적이고도 일관된 구상을 통해 하나의 유니버스 안에 모든 슈퍼히어로를 쓸어담는 것으로 방향을 다잡았다. 감독이나 제작사에 따라 원작 코믹스(만화)를 독자적으로 해석했던 것과는 달리, 전체 영화가 하나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세계의 부피를 조금씩 늘려가는 것으로 지금의 큰 그림을 설계했다. 각 영화의 주역들은 다른 영화의 조연이 되어 등장하거나, 조연으로 처음 선보였던 인물이 자기 이름을 앞세운 영화의 단독 주연으로 나서기도 했다. 예컨대 에 처음 나왔던 블랙팬서와 스파이더맨은 곧 자기 이름을 내세운 영화에서 활약했다. 이 경우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히어로들이 모일 때 생기는 불균질한 느낌을 줄이는 효과도 생긴다. 영화 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후속 영화에 대한 관심까지 커진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영화가 지닌 특별한 색깔을 유지한다. 한마디로 흩어져도 살고 뭉치면 더 잘 살게 된 것이다.
MCU의 대안 세계 전략은 이제 모든 시리즈 영화가 따라하고 있다. MCU와는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한 마블의 넷플릭스(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드라마 시리즈 역시 등을 선보이고 이를 합일하는 방식으로 자사의 성공 전략을 그대로 되밟았다. 마블엔터테인먼트의 모회사인 디즈니 또한 시리즈를 다양한 시대, 다채로운 관점으로 접근하던 방식에 더 힘을 기울이면서 다각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마블과 코믹스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DC코믹스도 뒤늦게나마 유니버스를 천명하며 슈퍼맨과 배트맨의 세계를 스크린 안에 모았다. 소니 역시 을 기점으로 마블의 다른 히어로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대안 세계를 설계하고 있다.
전작 ‘떡밥’이 후속작서 ‘반전’으로MCU 영화의 캐릭터들은 보통 영웅들과는 달리, 강대한 적을 두고 협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목도 한다. 여느 인간처럼 질투하고 토라지기도 하며 갈등을 겪다 화해하고 반성하고 마침내 성장한다. 특히 에서 시리즈의 ‘진(眞) 주인공’이었음을 확증한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앞서 언급한 거의 모든 인간적인 면모를 집약한 자유분방한 캐릭터에서 시작해, 마침내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성장한 진짜 영웅이 되어 최종장에 의미 있는 방점을 찍었다.
인간적이고도 변덕스러운 면모가 오히려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 모든 이들을 한데 모았으니 당연히 캐릭터마다 비중에 차이가 나기 마련이지만, 비교적 고른 배분이었다는 평가 역시 단순히 거대한 규모만이 최종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물론 ‘최애 캐릭터’를 향한 누군가에게는 아쉬움을 남겼을 테지만. 내내 감정에 휘둘리다 결국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적’ 싸움이었기에 수많은 캐릭터는 단순히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게 되었다.
작품이 연계되면서 만들어내는 재미도 간과할 수 없다. 각 작품의 감독은 다르지만 이전 영화에 나왔던 알 듯 모를 듯한 대사나 단서가 새 영화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큰 그림은 더욱 복잡한 플롯(구성)을 보인다. 이른바 ‘떡밥’이라는 복선을 통해 각 작품을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차기작 집중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과거 작품마저 복기하도록 이끄는 작품의 태도는 영화 뒷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익숙한 원작 코믹스의 설정을 뒤집는 파격도 빼놓을 수 없다. 시리즈 사상 최강의 적이라던 만다린은 에서 테러 집단의 대외 선전에 동원된 배우에 불과했으며, 코믹스에서는 늘 테러를 일삼던 외계 종족 스크럴은 에서 안식처를 잃은 난민으로 그려지며 관객의 예상을 기분 좋게 배신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데도 거침이 없다. 판타지 장르가 현실 세계를 은유하거나 투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MCU는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한 평행 세계를 상정해 이야기를 꾸려가기 때문에 시대의 첨예한 요구가 작품에 담기는 일이 많다. 예컨대 에선 MCU 최초로 여성 단독 히어로를 내세워 페미니즘 이슈의 중심에 섰다. 영화는 여성 히어로를 내세운 이유를 분명히 하는 장면으로 가득했고, 때때로 미러링(상대의 행위를 따라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현실에 만연한 젠더 문제에 냉소를 보냈다. 이에 백인 남성 중심 서사에 익숙한 관객이 반감을 보이며 한쪽에선 불매를 선언했지만, 모두 기우였다.
은 제작진이 나눈 MCU 작품군 구획 중 이른바 ‘3장(phase)’ 결말부에 해당한다(7월 개봉하는 이 그 마지막 작품이 될 예정이다). 마블의 1세대 주인공들이 퇴장하고 2세대 캐릭터들이 새로 MCU를 이끌게 된다. 1장 끝은 (2012)였으며, 2장의 마지막은 (2015)이었다. 말하자면 (2008), (2008), (2010), (2011), (2011) 등 각각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선보인 영웅을 에서 모아 마무리하면서, 이야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인물과 세계는 더욱 확장되는 식이다. 여기에 은 3장에서 전개했던 전 우주적 사건의 해결편이자, 지금까지 공개된 MCU의 모든 것을 포괄한 한 분기(1~3장)의 마지막 작품이다. 부터 주요 악당으로 나온 타노스는 이전부터 다른 MCU 영화에서 언젠가 ‘최종 보스’로 등장할 것임이 암시됐다. 실제 에서는 최종장에 걸맞은 대전쟁의 원흉으로서 시리즈 최정점에 선 안타고니스트(적수)로 활약했다.
또 영화가 공개되기 전 시리즈의 주역이나 다름없는 몇몇 배우의 계약 종료가 알려지면서 해당 캐릭터의 퇴장이 이번 작품에서 어떻게 그려질지도 관심을 모았다. 4장에서는 그 빈자리를 다른 이들이 메울 테니 앞으로 MCU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급변할 것이다. 한마디로 에 열광하는 것은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속편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마블의 대안 세계 전략의 최고점이자 11년간의 시리즈를 아우르는 대단원이다.
11년 대단원 ‘엔드게임’, MCU 성공은 미래진행형막이 내린 지금, 그 끝을 본 관객은 커튼콜(퇴장한 출연자를 다시 무대 앞에 불러내는 것)보다는 으로, 그다음으로 시선을 옮기는 중이니 MCU의 성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아니 어쩌면 미래진행형이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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