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일본 도쿄에서 ‘카미 로보’라는 전시회를 보았다.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종이로 프로레슬러 인형을 만들어왔다. 인형들은 키치적이었지만 훌륭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었다. 수십 명의 캐릭터들은 촘촘한 스토리로 엮여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었다. 작가가 두 인형을 움직이며 작은 링 위에서 갖가지 기술을 시연하는 영상은 특수촬영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가장 놀라운 점은 그 전시가 시부야의 번쩍거리는 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렸다는 사실이다. 일본이란 역시 오타쿠의 나라다.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그새 영화, 드라마, 아이돌 등 대중문화의 각 분야에서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열도 최후의 보루를 부수려는가보다. 자랑스런 오덕후들이 골방을 박차고 나와 오타쿠의 내공에 도전한다. (MBC)이 공중파의 한가운데 그들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덕력을 마음껏 자랑하고 장려금까지 타가라고 한다.
밀리터리나 삼국지 능력자는 출연 자체부터 대단한 용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분야는 덕질의 역사가 워낙 오래돼 누구도 자신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바둑으로 치면 천하의 9단급이 즐비한데, 내가 알파고와 붙어보겠다고 나서는 정도랄까? 어쨌든 일반인이 보기에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능력’보다 ‘덕심’을 검증하는 식의 구성은 아쉬웠다. 군 축제 기간과 데이트가 겹쳤을 때 여자친구를 포기했다는 사연은 (KBS)에 더 어울린다.
이미 인터넷에서 상당한 이름을 얻고 있던 편의점 덕후는 등장 자체로 반가웠다. 그의 이타적인 덕질은 많은 사람의 편의점 활용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로봇 능력자, 종이접기 능력자는 촬영장에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들은 확실히 ‘능력자’라는 타이틀이 어울렸다. 지네를 만들어 여자친구를 놀렸는데, 징그럽다며 야단맞는데도 기분이 좋았다는 덕후의 진실된 마음도 느껴졌다.
다만 버스 능력자, 빵 능력자의 경우처럼 도로나 현장에 나가 여러 미션을 해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실내에서 적당히 능력을 보여주며 연예인들을 동원해 토크를 만들어가는 구성의 한계라고나 할까? 연예인이 스스로 능력자로 나오기도 했는데, 박소현의 아이돌 능력자, 정준영의 포켓몬 능력자 외에는 특별히 흥미를 끌기 어려웠다. (KBS)의 게스트로 나와 잠깐 개인기를 하는 수준이랄까?
나는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서 ‘덕업일치’를 다루며 ‘덕후’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썼다고 녹음을 새로 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은 분명 파격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덕후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다고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자체에서도 덕후를 별난 사람 취급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마요네즈 능력자, 좀비 능력자처럼 이나 에 어울리는 사람을 출연시킨 것도 그런 편견의 결과라고 본다. 대중문화가 세분화·전문화되면서 덕질의 위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능력자들’의 능력을 인정한다면,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접도 필요하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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