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8월29일. 미국 뉴욕의 우드스톡 야외공연장에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가 존 케이지의 곡 를 초연했다. ‘초연’이란 말을 썼지만 데이비드 튜더가 4분33초 동안 한 거라곤 정확히 시간을 재며 피아노 뚜껑을 닫고 열고를 반복한 것뿐이었다. 는 침묵의 음악이다. 4분33초 동안 연주자는 연주하지 않고 청중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존 케이지는 절대적인 무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연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으로 를 만들었다. 당연히 이 작품은 많은 이야기와 논란을 낳았고, 그 뒤에도 여러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돼왔다.
2015년 10월10일.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국보 제67호 각황전 앞마당에 무대가 펼쳐졌고 오랜 시간 존 케이지 음악을 탐구하고 실천해온 피아니스트 토마스 슐츠가 를 연주했다. 슐츠 역시 피아노 뚜껑을 닫으며 연주를 시작했고, 존 케이지의 의도대로 4분33초 동안 우연의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9년째 빠지지 않고 아홉 번 행사가 열렸지만 그 존재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열 번째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제10회 화엄음악제가 10월10일 화엄사에서 열렸다. 처음의 이름은 국제화엄영성음악제였다. ‘영성’(spiritual)이란 말을 좁게 해석해 그동안은 요가나 명상음악을 하는 이들이 주로 화엄사를 찾았다. 8회부터 총감독을 맡은 원일 감독은 이를 바꿔나갔다. “음악에 충만히 빠져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영성음악”이라는 생각으로 출연진의 폭을 넓혔고, ‘화엄’(華嚴)이란 말 자체가 영성의 가장 높은 단계라는 생각으로 영성이란 말을 떼고 ‘화엄음악제’로 이름을 바꿨다. 이름은 간소화됐지만 상대적으로 더 국제적이고 높은 영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화엄사를 찾기 시작했다.
올해 화엄음악제를 찾은 아티스트들은 대중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현대음악을 하거나 고국의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가가 대부분이었다. 한국 출연진인 숨(su:m)(사진)이나 정재일, 한승석 역시 국악에 기반을 둔 음악가였다. 하지만 원일 감독은 음악에 온전히 자신을 담아낼 수 있는 음악가라면 낯설어도 충분히 감동을 주고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 확신은 10월10일 밤에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 처음 보고 처음 듣는 음악가의 음악이었을 테지만 집중도와 반응은 대단했다. 각황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갖가지 조명은 음악의 격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했다. 올해 음악제의 주제인 ‘심금’(心琴)처럼 마음을 울리는 아름답고 신비롭고 생소한 소리가 지리산의 기운과 만나 한데 섞여 있었다.
화엄음악제에 참여한 레바논의 음악가 디마 엘 사예드를 소개하는 문구는 이렇다. “약자의 연약함, 아름다움의 가치,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꿈꾸는 자들의 목소리.” 원일 감독은 이것이 영성음악에 가장 부합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다 같이 눈 감고 명상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대한 명상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다시 토마스 슐츠가 연주한 를 생각한다. 전남 구례라는 소도시의 산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우연 속의 소리가 꼭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다. 지리산의 바람 소리도 있었을 테지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소리와 앉을 자리를 찾아 보살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도 의 일부였다. 그 특별한 공간과 공기와 일상의 소리 사이에서 4분33초는 훅 지나갔다. ‘4분33초’ 뒤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시작됐다. 내 앞에 어둠이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음악가가 있었고, 대웅전과 각황전이 있었고, 수많은 봉우리와 산이 있었다. 비현실적인 시간이 꿈처럼 이어졌다.
김학선 음악평론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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