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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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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유년은 부모의 것

아들이 공룡을 버리고 레고 단계로 접어들어도, 나는 다음 단계로 갈 수가 없었네
등록 2015-07-11 07:35 수정 2020-05-03 04:28
VPI 코리아 제공

VPI 코리아 제공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말을 이 경우에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본 모든 남자아기들은 동일한 단계를 거쳐 소년이 되었다. 바로 자동차-공룡-레고 단계다. 그들은 일단 자동차 시기를 맞는데, 온갖 미니카와 중장비 차량 책자를 사들이다보면 어느덧 공룡 시대로 넘어간다. 공룡에 대한 남자아기들의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사랑을 대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전생의 연인이라도 만난 듯 처음 보는 바로 그 순간 사랑에 빠진다. 크고 힘세고 멋진 것에 대한 본능적 동경일까?

거대하고 평화로운 초식공룡도 매력적이지만 보통 ‘괴물’이라고 할 때의 원형 같은 매서운 눈, 날카로운 발톱, 가공할 이빨의 육식공룡들은 단박에 아기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들은 빠르고 대단히 공격적인데다, 무엇보다, 오래전에 사라졌다지 않은가? 이름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근사해서, 브라키오사우루스, 트리케라톱스에다가 스피노사우루스라니!

아기들이 판타지에 빠져 공격성과 탐구심을 마구 불태우는 사이, 엄마들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벨로시랩터, 마이아사우라 등의 이름과 어쩔 수 없이 친해지며 수장룡인 이크치오사우루스와 익룡인 프테라노돈을 알아가고 종류별로 컬렉션을 만드는 데 동참하게 된다. 새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공룡 같다 하는 걸 듣고는 공룡의 일부가 조류로 진화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인가 싶어 전율하며 공룡 전공 박사님께 전자우편으로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내가 천재를 낳았나본데 이를 대체 어찌 수습하나 고민하던 질풍노도의 공룡 시기가 어느덧 지나고 레고 시대가 도래했다.

아이들이 점점 공룡과 노는 빈도가 줄어들며 애지중지 사 모았던 소중한 공룡들은 장식품이 되어 무용지물로 전락해갔지만 어쩐 일인지 어른인 내가 다음 단계로 옮겨갈 수가 없었다. 내 아이와 처음으로 인간적 교제와 커뮤니케이션을 했던 매개가 공룡이라 그런지 나는 공룡들까지 마치 내 자식 같았고, 언젠가 이사를 가는데 짐정리를 하며 아이들이 버릴 것 담는 상자에 공룡들을 미련 없이 넣은 걸 보고는 분노와 배신감에 불타 몇 마리를 건져 나만의 비밀상자에 넣어두었다. 이담에 발견하고 자기 아이들 준다고 달라고 해도 절대 안 줄 생각이다. 이 소중한 공룡들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이제 한때 과학천재인가 싶었던 내 큰아이는 반에서 중간을 했다고 온 가족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실력의 고등학생이 됐고, 형 때문에 남들보다 오랜 공룡 시기를 보낸 그 동생아이는 정직하게 풀었을 때보다 찍었을 때 점수가 더 높은 중학생이 되었다. 개봉 소식을 듣고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1·2·3이랑 시기적으로 안 맞아 극장에서는 못 봤지만 DVD가 닳도록 봤던 아이들을 데리고 다 같이 를 관람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걸을 때도 공룡처럼 걸어 솔직히 좀 창피할 때도 있었던 애들이 공룡영화에 시큰둥해했다. 그래도 예매를 했는데 집안에 일이 생기고 기말시험이 다가오고 해서 아직도 못 봤으면서 아이들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사이 시간은 가고, 이 칼럼을 써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 혼자 가서 보았다. 공룡 재현 기술의 진화와 새로운 공룡에 대한 설정, 그리고 딱 우리 아이들만 한 주인공 형제의 사랑과 활약에 혼자 열광하고 혼자 감동하고 집에 와서 얘기해줬지만 아이들은 도무지 별 관심이 없었다. 아이의 유년은, 아이 자신의 것이기보다는 그 부모의 것인, 아주 특수한 시기다. 아이의 유년은, 부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세공을 남겼으되 본인들의 기억에서는 아예 사라져버린, 공룡이 살았다는 저어 머나먼 쥐라기 어느 때 같은 시간이다.

오은하 직장인·영화진흥위원회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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