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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도시?

<파이란>부터 <무뢰한>까지… 인천을 범죄의 공간으로 소비하는 영화들
등록 2015-06-20 19:17 수정 2020-05-03 04:28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한겨레자료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한겨레자료

20대 후반,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마다 뭔가 불편한 기류를 느꼈다. “바닷가 가까이 살아서 좋겠네요”라는 한가한 농담부터 “인천이 아니라 인촌 아니냐”는 비아냥에 이르기까지 주로 서울 토박이의 지역 차별성 발언에 마음이 언짢았다.

그 무렵, 인천공항 명칭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을 겪고 한국인이 인천을 부끄러운 존재로 느낀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종도 신공항은 지역 이름을 딴 것이니 그렇다 쳐도, 세종국제공항은 뜬금없었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 논리대로라면 한국의 모든 국책사업의 이름은 죄다 ‘세종’을 붙여야 한다. 사회 원로를 자처하는 분들은 무슨 협의회를 만들어 인천국제공항 대신 세종국제공항을 관철하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세종국제공항은 국민의 여론이었다. 1992년 9월 노태우 정부가 이름을 현상 공모한 결과, 1등이 세종이었다. 2위는 서울이었다. 인천이 서울의 식민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인천에 짓는 공항의 이름을 서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3위는 아리랑이었다. 잘 알다시피, 아리랑은 나를 버리고 떠나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는 노랫말이다. 비행기에서 발병 날 일이 없을 텐데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작 인천에 세우는 공항 이름을 ‘인천’으로 하자는 의견은 8위에 머물렀다. 한국인에게 인천은 그런 존재였다. 어디에 내놓기에는 부끄러운 도시.

서론이 길었다. 오래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인천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천은 범죄, 폭력, 살인을 다루는 영화가 꼭 찾는 도시다. 박훈정 감독의 배경은 서울이다. 그러나 석 회장(이경영)의 수족을 경찰 프락치로 몰아 살해하는 장면은 인천 앞바다 예인선에서 찍었다. 정청(황정민)이 강 과장(최민식)이 심어둔 스파이를 색출해 없애는 곳은 인천 항만 부두였다. 한준희 감독의 은 아예 인천 차이나타운이 중심이다. 살인과 장기적출이 판을 친다. 오승욱 감독의 은 안 그럴 줄 알았다.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서울 용산서 소속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술집 여자 혜경(전도연)이 마지막에 흘러들어 마약과 연루되는 장소 역시 인천이다. 2000년대 이후 등도 모두 범죄와 살인의 도시로 인천을 소비했다.

앞에 열거한 영화의 작품성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한 도시를 지속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공간으로 묘사할 수 있는가. 혹시 충무로 영화인의 무의식 속에는 인천을 ‘항구=범죄=조폭=살인=장기적출’의 연쇄회로 안에 가둬놓고 있지나 않은지 우려된다. 애써 인천의 이름을 지우려 했던 사회 원로와 인천을 범죄 공간으로 묘사하는 영화인 모두 인천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 사로잡혀 있다.

흔히들 인천을 제대로 그린 첫 영화로 정재은 감독의 를 꼽는다. 10대 소녀의 성장 이야기가 동인천의 배경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정재은 감독은 인천 출신도 아니다. 그는 외부인의 관찰자적 시점으로 인천의 속살과 소녀의 아픔을 스크린에 제대로 담아냈다.

‘서울공화국’의 나라에서 지방은 영화의 배경으로만 소모된다. 지역 정서를 희미하게라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나기가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

최근 서울 시민도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2조원의 경제 효과를 운운하며 도로를 통제하고 버스 노선까지 조정해 촬영한 의 서울은 어떠했는가. 대부분이 족발집 간판과 노후한 육교와 1970~80년대를 연상시키는 공간을 보며 착잡하다는 심정을 드러냈다. 그래도 범죄 소굴로 취급받는 인천보다 훨씬 낫다. 서울에선 슈퍼히어로가 뛰어다녔으니까.

곽명동 객원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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