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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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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난에 차려진 노동상담소?

본격 노동 학습 웹툰, 최규석 작가의 <송곳>…
원칙 없는 세상을 찌르는 주인공에 열광하는 댓글러들
등록 2014-07-10 14:43 수정 2020-05-03 04:27

“지금 일하다가 발 다쳐서 병가 냈는데 산재 할까봐 회사에서 전화 오지게 온다.”
“와… 내가 작년 여름 대형마트에서 일했는데, 정말 저래요. 아침에 출근하고 오픈 준비하다가 9시에 노래 맞춰서 이상한 체조 하고 박수 치고 인사하고. 그러고 나서 아침 미팅하고 일하다가 특정 시간 때마다 아침에 한 체조랑 박수 치기 또 함. (중략) 그리고 크리스마스 같은 경우, 판매실적 올리려고 케이크 반강제로 직원에게 구매시킵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근로기준법·최저임금 읊는 웹툰</font></font>

웹툰 〈송곳〉네이버 제공

웹툰 〈송곳〉네이버 제공

한 웹툰에 달린 댓글들이다. 웹툰이 ‘노동상담소’라도 차린 건가. 여기저기서 체불임금, 상사의 괴롭힘, 산재 신청 문제, 파견직의 설움 등 노동자로서의 온갖 고민을 털어놓는다. 심각한 내용 뒤에 붙은 자조 섞인 ‘ㅋㅋ’는 읽는 이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한다. 이 댓글들이 향하는 곳은 지난해 12월부터 화요일마다 연재하고 있는 최규석 작가의 웹툰 이다.

은 본격 노동 학습 만화를 지향한다. 첫 회부터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을 읊었고, 매회 노동 상식을 깨알같이 알려준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캐릭터는 이수인과 구고신이다. 이수인은 외국계 대형마트 중간관리자(과장)로 부당한 해고 지시를 거부해 직장 내 왕따가 됐다. 1부에선 이수인이 학교, 군대는 물론 직장에서까지 보통 사람들이 대체로 못 본 척 넘어가는 불의한 일들에 대해 끝끝내 ‘못하겠다’, 심지어 ‘날 치워봐라’고 말하며 세상의 ‘송곳’이 돼버린 과정을 전개했다. 1부의 마지막에서 회사의 ‘기대주’에서 ‘왕따’로 지위 변경한 이수인은 2부에서 베테랑 노동운동가 구고신을 만나며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은 등 주로 출판 만화 작업을 해온 최규석 작가의 첫 번째 웹툰이다. 무겁고 진지한 ‘노동’이라는 주제를 온라인에서 가장 대중적 플랫폼 중 하나인 네이버에서 풀어내는 시도를 했다. 위근우 웹매거진 취재팀장은 “현실비판적 작품을 주로 해온 최규석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이 네이버에서 연재된다는 것은 작품을 보는 의미 있는 포인트다. 네이버 웹툰의 타깃층이 10~20대 초반으로 다음에 비해 젊은 만큼, 평소 ‘노동’이라는 주제를 생소해하는 독자층에게 다가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네이버에서 의 순위는 비교적 중·하위권이다. 그러나 달리는 댓글에는 에 대한 애정과 응원이 넘친다. ‘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순위가 낮냐’는 누군가를 향한 댓글러의 타박도 많다.

현실에 발붙인 작품인 만큼, 댓글들도 매우 현실적이다. 학교에서 촌지를 요구하는 ‘블랙홀’ 교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저마다 ‘촌지 수수’ 교사를 만난 흑역사를 털어놓고, 최저임금이 언급된 에피소드에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때 받았던 임금을 얘기하며 그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김낙호 만화평론가가 최규석 작가의 초기작 에서 평한 것처럼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소외와 모순 속에서 이야기를 꺼내오는” 능력이 에선 날개를 달았다.

회가 진행되면서 댓글의 양상은 묘하게 변한다. 작품 초기에 ‘나도 그랬다’라는 한탄형 댓글이 많았다면, 캐릭터가 구축되고 작품이 본격 전개되는 2부에 들어서면 이수인·구고신 캐릭터에 열광하는 공감형 댓글이 많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밥도 혼자 먹는 등 결벽증세가 있는 이수인이 구고신의 충고를 받아들여 사람들과 밥을 먹기 위해 시도하는 장면. 식사하는 마트 아줌마들 옆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이수인이 ‘헤에에’ 웃는다. 댓글러들은 “귀여워 ㅋㅋㅋㅋㅋㅋㅋ 헤에래”라며 그의 ‘귀한 미소’에 즉각 반응한다. 급기야 이 회에선 “이수인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가?”라는 미모 ‘드립’도 베스트 댓글이 됐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SNS선 2차 창작물 퍼나르며 팬덤 형성 </font></font>

트위터에서는 이수인 캐릭터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특히 몇몇 선구적인 팬 겸 트위터 이용자들이 이수인이 노동조합에 영입하려는 성격 좋은 미남 청년 주강민과의 ‘퀴어 로맨스 코드’를 추출하면서 각종 2차 창작물까지 트위터를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6월23일 연재된 2-13회에서 주강민이 이수인에게 ‘과장님 대신 승진을 기대하기도 했다’는 고백을 하며 “화 안 나세요?”라고 묻는 장면에서 이수인의 대사인 “전 3주 전 처음 해고 지시 받았을 때부터 계속 화가 나 있는 상태라서요”는 ‘멋진 남자 이수인’을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에서 ‘퀴어 코드’를 추출해 트위터에 유포한 트위터 이용자 ‘바틸트’(@barTILT)는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어서 몇 번씩 다시 보다보니, 이수인 등 캐릭터가 미남이었고 그런 코드가 읽혔다”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라는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뭐 하나 원칙대로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법대로’ 또 ‘말하는 대로’ 살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캐릭터이기에 더욱 미남으로 보이는 걸 거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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