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희 모두를 사랑하지만, 지금만큼은 너희를 (랩으로) 죽여놓으려 해. 너희 골수 팬들조차 너희를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만들어버리겠다는 거야. (중략) 경쟁이 뭔데? 난 수준을 높이 올리려는 것뿐이라고.”
미국 힙합 신의 대세 켄드릭 라마가 동료 래퍼 빅 숀의 곡 (Control)에 참여해서 뱉은 이 가사는 마치 요물처럼 현지뿐만 아니라 한국 힙합 신까지 크게 한번 들었다 놨다. 캘리포니아 콤프턴에서 일으킨 날갯짓이 우리나라에서 전례 없는 래퍼들 간 디스 전쟁, 일명 ‘컨트롤 대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본디 켄드릭 라마의 가사는 특정 래퍼를 디스하는 내용이 아니다. 트렌드 좇기와 차트 오르기에 혈안이 된 나머지 개성과 멋이 사라진 현 힙합 신을 향한 비판이 요점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스윙스-어글리덕-테이크원-이센스-개코(다이나믹듀오)- 사이먼디’로 이어지면서 거대한 디스 전쟁으로 변했다.
오랫동안 이빨 숨겼던 한국 힙합
아무래도 힙합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잘 몰랐거나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오른 달달한 감성 트랙만으로 힙합을 접한 대중에겐 다소 충격적이고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이센스 vs 개코’ ‘스윙스 vs 사이먼디’ 구도가 예상보다 훨씬 과열되면서 상황이 위험수위로 치달았다. 그러나 장르와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이슈가 되니 끼어든 몇몇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언급(‘애들 싸움 혹은 유치한 싸움’)과 달리 이번 사태는 매우 건설적인 논란거리를 던지며 긍정적인 여운을 남겼다.
사실 한국의 힙합 음악은 대중의 눈치를 보느라 너무 오랫동안 이빨을 숨기고 있었다. 영화 속 골드문이 경찰의 농간에 놀아난 것처럼, 일부 메이저 기획사와 연예매체의 농간에 우리나라에서 힙합은 어느샌가 온순하고 애교스러우며 눈물 많은 음악이 돼 있었다. 이렇게 음원 차트 노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최루성 신파 멜로보다 더 억지스러운 감성을 담은 곡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힙합의 원초적 특성 중 하나인 공격적이고 거침없는 부분이 드러난 건 바람직하다. 중요한 건 그 공격성이 맹목적이거나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 특정 대상(개인·단체)이나 상황을 향한 개인의 경험과 주관에서 비롯되며, ‘라임’과 ‘플로’라는 랩의 기술을 바탕으로 구현된다는 점이다. “회사는 발목을 자르고 목발을 줘/ 내가 걷는 건 전부 지들 덕분이라고 턱”이라는 이센스의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래퍼들은 하려는 이야기를 비유법 또는 언어유희를 통해 전달하면서 랩 디스전이 일반적인 말다툼과는 다른 영역임을 드러냈다. 랩·힙합이 사랑, 이별, ‘난 최고 넌 ×신’으로 대표되는 스왜그(Swagg) 말고도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을 담아내는 장르인지 잊었던 이들에게까지 좋은 충격을 준 셈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렇게 힙합의 공격적 측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한국 힙합 신의 치부까지 자연스레 들춰졌다는 점이다. 어글리덕의 “넌 로엔이랑 계약한 라이머랑 계약한 JM 사장님”에서 노출된 ‘메이저 가요계와 한국 힙합 신 사이의 상하 계급관계’, 테이크원의 “아이러니하게도 형이 말한 버벌진트와 산이?/ 그 둘도 변했잖아 차트 위 좋아 보여도 아는 사람 얘기잖아/ 이건 디스 아닌 우리가 가진 공통된 문제”나 딥플로우의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긴 ×발 언더그라운드/ 우리가 사는 집 기둥을 세운 META/ 그 집을 먹여살린 건 결국엔 ZICO와 Jay Park” 등의 가사가 대변한 ‘변질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방어막으로 삼는 실체 없는 힙합 대중화’ 등이 대표적인 예다.
다소 부정적인 시선이 있더라도상처가 곪으면 터지기 마련이고, ‘컨트롤 대란’을 계기로 여기저기서 곪아 있던 상처가 실제로 터져버렸다. 여기서 ‘힙합=디스’라는 인식이 퍼진 것에 대한 우려나 랩 배틀이 아닌, 감정 싸움으로 변질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는 법, 한때 힙합 뮤지션과 팬들 사이에서 ‘가짜’로 취급되던 랩 발라드 작법을 그대로 가져와 기형적인 형태로 둔갑시킨 ‘감성 힙합’ 혹은 ‘한국형 힙합’을 두고 힙합이 대세라며 호들갑 떨던 언론이나 친분을 이유로 맹목적인 응원을 보내던 래퍼들에 의해 관심이 이는 것보다 다소 부정적인 시선이 있더라도 이번처럼 힙합 본연의 특성 중 하나로 장르가 알려지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번 사건의 발단을 제공하고 괴물 같은 면모를 보여줬던 스윙스가 소속사 사장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 열광하던 이들을 민망하게 했지만, 어쨌든 이제 치부는 까발려졌고 새로운 판이 열렸다. 이걸 없었던 일로 덮고 다시 ‘무늬만 평화’를 이어나갈지, 이를 계기로 일부에서나마 힙합의 멋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날지는 결국, 뮤지션들에게 달렸다.
강일권 힙합·R&B 미디어 편집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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