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린다. 발등에 큰 불이 떨어졌을 때만, 단거리 주자가 된 심정으로. 발을 대신해 달려줄 이동 수단이 넘쳐나는 시절 체력을 소모하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를 쓴 노르웨이 역사학자 토르 고타스도 말하지 않았나.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의 지구력을 손상시키기 십상”이라고. 그래서일까. 지난 몇 년 사이 잃어버린 지구력과 순발력을 찾아 부지런히 걷고 달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숨 돌리며 걷고 뛸 만한 코스를 공유하는 사람도 늘었다. 서점에 쏟아지는 걷기와 관련된 책들, 도시에서 열리는 ‘러닝 페스티벌’ 신청자가 폭주한다는 사실이 열풍을 방증한다. 밤이 어둑해지면 달빛을 조명 삼아 달리는 이도 늘고 있다. 러너들의 세계는 밤과 낮 구분이 없었다.
지난해 ‘운도녀’, 올해는 ‘나포츠’지난해 운도녀(운동화 신은 도시 여자), 운도남(운동화 신은 도시 남자)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면, 올해 운동화 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은 나포츠(나이트와 스포츠를 결합한 신조어)다. 나포츠족은 이를테면 달밤에 체조하는 사람들, 달이 밝으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특히 올여름에는 기록적인 무더위로 밤에 야외 활동을 하는 이가 더욱 늘었다. 패션 경향도 밤 운동 열풍을 도모했다. 지난해부터 네온 컬러가 유행하면서 올 시즌 스포츠 브랜드에서도 형광색 제품을 다수 출시했는데 안전을 위해 밝은 색상의 운동용품을 찾는 나포츠족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아웃도어·스포츠 브랜드에서는 등산·캠핑·트레킹에 이어 달리기를 주목하고 있다. 걷기 유행이 점차로 속도를 내며 달리기 유행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이 의견이다. 푸마코리아 마케팅팀 이원희 과장은 “러닝에 대한 관심과 용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정통적인 마라톤 대회뿐 아니라 초보 러너를 위한 러닝 페스티벌도 다수 열리는데 열기가 대단하다”고 전했다. 지난 5월 스포츠용품 브랜드 뉴발란스에서 개최한 ‘2013 뉴레이스 서울’은 서울에서 참가자 2만 명을 모집했는데 6분여 만에 접수가 완료됐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에너자이저 나이트 레이스’ 또한 매해 참여 열기가 대단하다. 에너자이저 대회 사무국 관계자는 “달리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펀 런’(fun run)을 하는 사람이 늘면서 해가 갈수록 접수 마감이 빨라지고 있다. 멀리 강원도·제주도에서 오는 참가자도 있다”고 전했다. 달리기는 비용이 적게 들고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넓게, 오래 지속될 조짐이 보인다.
8월19일 저녁 7시 스포츠 브랜드 푸마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나이트 트레이닝 데이’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함연식 선수(마라톤 및 철인 3종 경기)와 강사진들은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고 부상 위험이 적은 미드풋 주법과 운동 전 스트레칭, 근력 운동법 등을 알려줬다. 참가자들은 평소에 달리기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달려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초보 러너들이었다. 기능성 러닝복을 갖춰 입은 사람보다 평범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이 더 많았고, 소소한 팁을 알려줄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귀기울였다.
종아리 힘 주지 말고 허벅지 힘으로달리는 동안에는 체중의 3배가 넘는 충격이 발과 발목에 실린다. 장시간 잘못된 자세로 달리면 몸에 무리가 간다. 흔히 장거리 달리기에서는 발뒤꿈치부터 땅에 닿는 착지법(힐스트라이크)이 일반적이었는데, 최근 러너들 사이에서는 베어풋·미드풋 등이 새로운 주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베어풋은 인류의 조상이 그랬듯 맨발로 달리거나 혹은 맨발로 달리는 효과를 주는 신발을 신고 하는 주법이다. 베어풋 주법으로 달리면 발 전체가 바닥에 닿아 순간적인 충격이 발뒤꿈치로 집중되지 않아 무릎과 발목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평소 쓰지 않는 관절 주변의 잔근육과 엉덩이 근육을 키워주기도 한다.
이날 교육에서 배운 미드풋 러닝 또한 발뒤꿈치에 충격이 모이는 것을 완화하는 주법이다. 발의 중간 부분이 땅에 먼저 닿도록 뛰는 방식이다. “종아리에 힘을 주지 말고 허벅지를 들어올려 보세요.” 다리 훈련을 함께 한 서성현 코치는 다리를 기역자로 만든 뒤 허벅지 힘으로 양발을 번갈아가며 점프해보라고 했다. 평소 종아리에 쥐가 자주 나서 뛰는 것을 가급적 피해왔는데, 허벅지 근육을 이용하니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뛸 수 있었다. 착지법에 대한 강의도 이어졌다. 앞서 훈련한 허벅지 힘으로 다리를 들어올리는 연습이 도움이 됐다. 허벅지를 몸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기분으로 무릎을 약간 굽혀가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발을 내려놓으니 발뒤꿈치 대신 중간 부분이 바닥에 닿았다. 팔도 아무렇게나 흔드는 게 아니었다. 몸 가운데 브이(V)자가 되도록 자연스레 주먹 쥔 손을 모으고, 앞과 뒤 3:7 정도의 폭으로 팔을 움직이며 제자리뛰기 연습을 했다. 윤은희 코치가 시키는 대로 팔을 점점 빠르게 움직여보니 제자리에서 뛰는데도 속도가 붙었다. 코치들은 근력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몸에 피로를 덜 주고 오래 달리려면 배와 허벅지는 물론 팔의 근력도 키워야 한다. 훈련에 참가한 사람들은 근력 훈련 단계에서 가장 힘들어했다. 상체를 바닥에 절반쯤 대고 다리를 일자로 펴서 차례로 움직이는 동작과 팔을 앞으로 쭉 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여기저기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달리기. 잠실종합운동장 인라인스케이트연습장 주변 트랙을 500m씩 나눠 두 차례 총 1km를 뛰었다. 배운 대로 허벅지 근육으로 다리를 들어올리고 팔을 가슴 앞으로 모아 적당한 폭으로 흔들고 배의 힘으로 허리를 받쳐주니 달리는 데 힘이 덜 들었다. 조금만 뛰어도 옆구리가 찌르는 듯 아파 포기하곤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여전히 더운 밤이었지만 몸에서 나는 열기가 바깥의 기온을 압도했다. 달릴 무렵 밤은 더욱 짙어져 주변의 산만한 배경이 어둠 속에 가라앉고 뛰는 사람들의 숨소리 말고는 풀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시각과 청각을 거스르는 것들이 사라지니 숨은 찼지만 마음은 평온해졌다. 내일쯤 온몸이 근육통으로 멍든 것처럼 아플 게 분명했지만 이대로 계속 달려도 좋을 것 같았다.
변함없이 달리는 주자들의 희열토르 고타스에 따르면 조깅이 도입된 초창기인 1960년대, 거리를 뛰는 이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랬다고 한다. “도대체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법도 잘 지키는 시민들이 굳이 왜 길거리에서 달리기를 하러 밖으로 나간단 말인가, 그것도 한밤중에?” 달리기에 빠져들었던 많은 사람들의 답변은 명쾌했다. “기분이 훨씬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13년, 세대를 거듭하며 변함없이 달리는 주자들의 희열이 밤을 타고 번져간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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