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조용필과 1990년대의 조용필은 달랐다. 1980년대의 조용필은 마치 공무원처럼 정기적으로 앨범을 발표했고, 각 방송사를 다니며 쉼없이 (늘 프로그램의 마지막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 시절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1980년대를 ‘조용필의 시대’라 말한대도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의 조용필은 달랐다. 그는 예전처럼 TV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선 곳은 TV의 쇼프로그램이 아니라 전국의 공연장이었다. 이어서 마치 짠 것처럼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시대의 아이콘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모든 미디어를 점령하고 그에 맞춰 음악의 향유층이 더 어려지고 있을 때 조용필은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불렀다. 비록 예전과 같이 화려한 조명은 받지 못했지만 그는 ‘조용필=콘서트’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공무원에서 콘서트 브랜드로
그렇다면 2000년대의 조용필은? 1990년대의 조용필과 그리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 사이에는 ‘세월’이라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더 나이를 먹어갔고, 그의 전성기가 지난 뒤 태어난 세대에게 그는 교과서 속 위인 같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2000년대가 시작되고 그가 발표한 앨범은 18집 (Over The Rainbow·2003) 딱 한 장, 그마저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예전과 비교할 수 없게 빨리 묻히고 잊혀갔다. 그래서 지금의 이 ‘갑작스러운’ 반응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0년대의 조용필은 적극적이고 젊어진 홍보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방송사가 아닌 포털 사이트를 홍보 플랫폼으로 선택했고 싱글 ‘선(先) 공개’ 방식을 통해 미리 관심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를 지지해줄 기성세대는 잠시 놓아두고 젊은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 방식은 성공적이었다. 싱글 (Bounce)를 먼저 공개한 4월16일부터 앨범 (Hello)를 발표한 4월23일까지 ‘조용필’이란 이름은 각종 게시판에서 계속 오르내렸고 음원 차트의 지붕을 뚫었다. ‘지붕을 뚫었다’는 말은 한 음원 사이트의 실시간 점유율 그래프에서 표현할 수 있는 한계 수치를 넘는 걸 뜻하는 인터넷 용어로, ‘조용필’이란 이름과 ‘지붕을 뚫었다’는 신조어가 함께 사용되는 것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홍보 방식만큼 음악도 젊고 새로웠다. 하지만 이 사실이 꼭 ‘좋다’ 혹은 ‘훌륭하다’는 평가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사실’(fact)은 새롭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미디어에선 앨범에 대한 분석보다는 ‘새롭다’와 ‘훌륭하다’가 마치 연결된 것처럼 관성적으로 극찬을 쏟아냈다. 물론 미디어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 있고 또 조용필이 지금껏 쌓아올린 빛나는 역사에 대한 예우도 작용했겠지만 다소 과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18집 를 발표했을 때도 미디어에선 ‘오페라 록’이라는 표현과 함께 보도자료를 ‘우라까이’(‘베끼기’라는 뜻의 언론계 은어)하며 다시 없는 음악인 것처럼 극찬했지만, 그 음악은 이미 유럽의 수많은 헤비메탈 밴드들이 20년 동안 해온 멜로딕 파워 메탈의 한 형식이었다. 언제나 과한 것은 모자라니만 못하다. ‘조용필 버프’가 아닌 온전한 앨범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더 나은 예우일 수 있다.
외부 작곡가의 곡들, 통일성 약점나는 기본적으로 가 잘 만든, ‘웰메이드’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기운을 잘 잡아냈고 사운드는 탄력이 넘친다. “틀 안에서 머무는 나를 탈피해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는 의도는 성공적이다. 400~500곡 가운데 6곡을 골랐다는 그의 안목은 그가 아직도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공들인 사운드는 이 앨범의 가치를 더 높여준다. 수없는 시도 끝에 완성해냈을 이 청량한 사운드는 ‘음악가’ 조용필을 존중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런 미덕에도 이 앨범이 조용필의 대표작이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가장 먼저 음악과 보컬의 미묘한 엇갈림은 앨범을 반복해 들을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그의 창법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겉돈다. 또 에 삽입한 랩은 ‘젊음’ 혹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낳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군더더기에 가깝다. 외부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으면서 옅어진 앨범의 통일성도 약점으로 작용한다. 에서 들려주는 ‘조용필스러움’과 버벌진트의 랩이 한 앨범에 동거한다는 사실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결국 는 일종의 과도기적 앨범이 될 것이다. 20집에서 어떤 음악을 들고나올지는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이 앨범은 과도기적이다. 돌이켜보면 그가 1990년대에 했던 음악은 참으로 훌륭했다. 비록 대중적으로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일관되게 ‘성인 취향’의 록 음악을 담은 그 앨범들은 큰 가치가 있었다. 지금보다 더 주목받았어야 할 결과물이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앨범’들이 됐다. 어쩌면 지금의 ‘변신’은 그때의 무관심이 일으킨 나비효과일 수도 있겠다. 그 시간을 거치며 그는 변신을 택했다. 환갑을 넘은 노장의 변신은 분명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인 찬사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이 앨범은 딱 그 지점에 서 있다.
김학선 음악평론가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윤, 국무위원들 계엄 반대 와중에 “발표해야 하니 나는 간다”
공수처, ‘경호처장 강제구인’ 뒤 윤석열 체포영장 재집행 가능성
[단독] 문상호 “1인당 실탄 10발 준비”…계엄 당일 지시
경찰, ‘윤 체포 방해 의혹’ 55경비단장에게도 출석 통보
[영상] 공수처 “군·경호처 200명 팔짱 끼고 체포 막아…일부 총기 소지”
‘화살촉 머리’ 플라나리아, 국내서 신종 21종 발견
버티는 윤석열에 보수언론도 “비겁하기 짝이 없다”
‘공수처와 관저 대치 의혹’ 군인들, 김용현 경호처장 때 배치됐다
야구팬들도 관저 앞 ‘분노의 깃발’…체포 막은 경호처에 “윤과 한패”
윤석열 무조건 보호가 숭고한 사명? ‘내란수비대’ 경호처 폐지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