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지더라도 패배하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1월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 2012’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다큐멘터리 은 2012년 런던올림픽 첫 여자복싱 국가대표 선발을 목표로 주먹을 다지는 선수들의 3년간의 일정을 영상에 담았다. 지난 8월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에서는 스포츠 다큐멘터리 코너를 따로 마련하고 을 포함해 야구(), 스포츠댄스(), 남자복싱(차이나 헤비급>), 육상()을 소재로 한 작품 5편을 선보였다. 10월7일 방영된 KBS 에서는 시각장애와 뇌병변장애를 동시에 가진 19살 박성수 선수의 경남 통영 트라이애슬론 월드컵 도전기를 그렸다.
승려 같은 정신으로 던지는 너클볼
바야흐로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시대가 열린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크지 않은 다큐멘터리 시장에서 스포츠 다큐멘터리 홀로 거센 파도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잔잔한 물결로 이야기의 울림을 더 확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스포츠가 가지는 드라마틱한 흡입력은 사람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매력적인 도구다. 더불어 비인기 종목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자 다양한 종목으로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폭도 넓어지고 있다.
의 팀 웨이크필드(1995~2012 은퇴,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메츠의 R. A. 디키는 ‘너클볼러’다. 너클볼은 검지·중지·약지 세 손가락을 구부려서 손톱을 사용해 튕기듯이 던지는 공이다. 시속 110km 정도에 불과한 느린 공은 회전 없이 날아가다 홈플레이트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변한다. 투수도 자신의 공이 마지막에 어느 쪽으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너클볼러들은 때때로 다른 선수들에게 사기꾼이나 괴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괴물이 아니다. 그 공을 던지려고 괴물같이 엄청난 인내심으로 선수 인생 모두를 걸었을 뿐이다. 선임편집자 로저 에인절은 시합을 거듭할수록 구질이 발전하는 너클볼을 던지려면 “승려 같은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그랬듯 “자라서 너클볼 투수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어린 선수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고 그 안에서 괄시며 외로움과 싸웠고 길 끝에 열린 단 열매를 향해 느리고 꾸준하게 전진 중이다. 팀 웨이크필드는 44살에 200승을 채우고 은퇴했고 오른팔에 인대가 없어 시련을 거듭한 R. A. 디키는 올 시즌 메이저리그 사이영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다.
종이 울리고 시선이 옮아온 곳은 링이다. 은 전직 복서 박현성 관장과 그 제자들의 올림픽 국가대표 도전기다. 박현성 관장은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내리 2등만 했다. 거듭 좌절한 선수생활 뒤에 찾아온 것은 조직에서 주먹을 쓰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다른 조직을 상대하다 발목 아킬레스건을 잘렸다. 결국 다시 돌아온 곳은 링이었다. 박현성 관장은 정규 코스를 밟고 올라온 엘리트 선수들을 키우지 않는다. 복싱 세계의 변두리에 섰던 감독과 선수들이 모였다. 박주영 선수는 여성 복싱 첫 국가대표를 꿈꿨지만 도전은 런던올림픽 직전에 멈췄다. 60kg급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선 박 선수는 결선에서 18 대 40의 큰 점수차로 밀렸고 박 관장은 흰 수건을 던지며 기권했다.
을 연출한 이진혁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스포츠라는 극한의 상황을 통해 인간 내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복싱은 스포츠 경기로서 힘을 잃은 지 오래인데 예의 헝그리정신은 왜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을까. 맨몸으로 승부하는 스포츠, 그 안에서 느끼는 개인의 외로운 감정 같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보다 사람이 만드는 미세한 결
10cm 앞만 보이고 나머지는 빛과 어둠이다. 10월7일 방영된 ‘철인 성수와 그들이 강해지려는 이유’는 통영 트라이애슬론 월드컵에 도전한 박성수 선수의 이야기다. 이 3년의 도전기를 그렸다면, 이것은 단 3일간의 기록이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는 선수,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출발 신호를 따라잡으려면 카메라는 잔뜩 예민해야 한다. 의 정찬필 KBS PD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바라보면 어디를 겨냥하고 있다가 장면을 잡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한 장면에 5대 이상의 카메라를 투입하기도 했지만 선수의 움직임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대신 미시적 접근을 통해 이야기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를 움직이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결에 더 주목한다는 뜻일 테다.
“스포츠를 통해 한 문화권의 움직임, 새로운 세력의 도전을 보여줄 수 있다면…. 예컨대 이란에서 레슬링에 도전하는 여자 선수의 이야기 같은 것, 문화의 변화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스포츠는 큰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EIDF 사무국장 오정호 EBS PD의 말이다. “기록의 장르라는 점에서 스포츠는 도큐멘트의 의미가 강하고, 드라마틱한 승부 혹은 개인의 도전이라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스포츠는 이렇게 조금씩, 사람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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