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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면

‘엄마 노릇은 자연스럽고 행복한가’라는 질문 던지는 두 영화 <케빈에 대하여> <시스터>
등록 2012-08-25 15:35 수정 2020-05-03 04:26
영화 <케빈에 대하여>. 티캐스트 제공

영화 <케빈에 대하여>. 티캐스트 제공

영화 <시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시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인간이 갖춘 덕목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숭고한 정신인 모성.”() 이 말은 사실일까? 모성 천부설이 통하지 않던 사회도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 프랑스에서는 공립 고아원에 자신의 아이를 맡기는 것이 유행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 셋 중 하나는 버리는 것이 유행이었단다. 지금은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달갑게 치른다는 모성의 이념이 정착된 사회다.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족한 어머니가 있다면 병리학이나 범죄학 수준에서나 다루어진다. 그런데 최근 과연 엄마 노릇은 자연스럽고 행복하냐고 묻는 영화들이 나왔다. 이기적인 엄마, 나쁜 엄마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실은 아주 ‘보통의 엄마’다.

태어나는 날부터 핏빛이었어

영화 의 주인공 에바(틸다 스윈턴)는 여지껏 돌아다닌 곳의 지도만으로도 방 벽면을 도배할 수 있을 만큼 열정적인 여행가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집안 울타리에 갇힌다. ‘너만 없었더라면….’ 상상만 해도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더 무서운 생각도 있다. 현실에선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엄마기도 한 여배우 틸다 스윈턴은 제작노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아이가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날지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이 나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이런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만약 아이들이 전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영화는 아이가 제대로 클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 내 아이를 해칠지 모르는 요소들에 대한 두려움 같은 보통 엄마의 근심거리를 넘어 엄마들의 내밀한 의구심과 두려움을 꺼내놓는다. 내 아이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엄마 노릇을 위해 집에 갇혀야 할 만큼 위대하고 특별한 존재인가.

분명 사랑으로 임신했지만 사랑하기 어려운 아이가 케빈(에즈라 밀러)이다. 아기 때부터 엄마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행동한다. 엄마에게는 ‘악의 씨’처럼 보이고, 아빠에게는 귀여운 아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케빈만일까?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바닥이 얼마나 얕은지 절감해본 여자라면, 아이 울음소리에 쫓기다가 차라리 공사장 소음을 들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케빈의 엄마에게 공감을 느낄 만하다. 남몰래 공감한다면 말이다. 그저 조숙하고 예민하며 엄마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아이는 괴물이 되었다. 아이를 낳고서도 자신의 꿈의 지도를 접지 못했던 엄마가 괴물을 키운 걸까. 아이가 친구와 가족들을 죽인 살인마로 돌변하던 피의 그날 밤, 에바는 아이를 처음 품은 그날부터가 핏빛이었다고 느낀다. 아이가 엄마에게 품었던 갈증과 엄마가 아이에게 가졌던 긴장의 결과치고는 너무도 참혹하다.

엄마에 대해 풀리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소년이 또 하나 있다. 8월10일 개봉한 영화 에는 알프스 스키장에서 스키장비를 훔쳐서 파는 소년이 나온다. 소년 시몽(케이시 모텟 클레인)이 날마다 곤돌라를 타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우유나 휴지를 살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소년이 훔쳐온 옷과 빵이 없으면 앞가림도 못할 무책임한 누나 루이(레아 세이두) 탓만도 아니다. 돈 주는 것을 사랑의 유일한 표현으로 배운 열두 살 소년은 도둑질로 번 돈을 누나를 위해 아무렇게나 써버린다. 술과 남자친구에게 정신 팔려 크리스마스 때도 소년을 혼자 내버려두는 누나를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매질과 위협, 온갖 굴욕에 무감각한 소년은 오직 하나 누나의 애정에만 민감하다. 누나에게 청바지를 입혀주고 술값을 대는 소년이 실은 더 누나에게 의존한다.

모성은 없었지만 어머니는 있었다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내게 익숙해졌을 뿐이지.” 의 린 램지 감독은 케빈의 입을 빌려 엄마들에게 모성을 연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모성은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일까. 정신분석가 이승욱씨는 이 영화를 두고 “에바는 케빈과 육체적 접촉을 최소화한다. 달랠 때도 안아주는 게 아니라 들고만 있는 식이다. 아이는 그런 엄마를 감지한다”고 했다. 케빈이 왜 엄마는 죽이지 않았을까. 추측이 분분하지만 이씨는 “엄마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라고 분석하고, 영화의 원작인 소설 에서는 “관객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번도 널 원하지 않았어.” 의 엄마는 소년에게 거침없이 말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모성 본능은 축복이 아니라 주홍글씨다. 아이들에게 모성 결핍은 재앙이다. 영화는 어긋난 양육에 대한 경고일까? 그보다는 모성 신화에 질식당할 것 같은 어머니들이 어떻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소묘처럼 보인다. “사람들에게 엿 먹이고 싶어서” 너를 낳았다던 어머니도, 살인자의 어머니라는 굴레를 쓰고 사는 어머니도 ‘사랑’이라는 상투적 변명 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모성은 없었지만 어머니는 있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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