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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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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경성미용원 원장님의 화장법 강의

신현규 교수가 발굴한 1926년 발행된 미용잡지 <위생과 화장>의 ‘화장문답’

경성미용원 남자 원장 현희운이 창간한 책에 실린 미용 고민 오늘과 다르지 않아
등록 2012-08-14 19:10 수정 2020-05-03 04:26
1926년 발행한 <위생과 화장> 제1권 2호의 표지(왼쪽)와 잡지에 실린 ‘화장문답’ 기사. 신현규 제공

1926년 발행한 <위생과 화장> 제1권 2호의 표지(왼쪽)와 잡지에 실린 ‘화장문답’ 기사. 신현규 제공

“저는 지금 나이 삼십이 갓가워 섯음니다. 집안에서 살임사는 사람이니까 그 처름 모양을 낼야고도 하지 안이하지만은 그래도 내가 보기 실은 것은 남도 보기 실켓기에 이런 말슴을 바뿌신 선생님께 뭇슴니다. 이마가 점점 버서저가서 지금은 겨우 잔털만 남어 잇슴니다. 이것이 아주 버서지면 대단이 보기가 실을 것 가틈니다. 엇지하면 조홀는지 좀 가러쳐 주시기를 바라니다. (대구에서 근심생)”

1926년 발행한 제1권 2호 중 독자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화장문답’에 실린 한 질문이다. 은 국내에서 발굴된 근대 잡지 중 최초의 위생미용잡지다. 이보다 앞서 이라는 미용잡지가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 발굴된 자료는 재단법인 아단문고에 보관돼오던 것으로 지난 7월 신현규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가 5호에 소개했다.

남성도 화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

올 컬러, 총 64쪽으로 구성된 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화장을 강의하듯 쉽게 이야기로 풀어쓴 ‘화장강화’라는 연재 코너와 앞서 언급한 ‘화장문답’이다. 발굴된 제1권 2호의 ‘화장강화’에서는 “화장은 하루라도 빠질 수 없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 낱낱이 들여다봐도 꼭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화장이라고 하는 것은 각각 그 개성을 따라 분장이 달라야 한다”고 하는 등 화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화장문답’은 코에 흉이 져서 고민이라는 독자에게 성형외과에 가볼 것을 권하고, 나이가 젊은데 눈이 쑥 들어가서 보기가 싫어 고민이라는 독자에게는 ’꼬오을드크리임’으로 마사지하기를 권한다. 맛사지하는 방법은 ‘화장강화’에 나오니 챙겨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1892년 미국에서는 이미 가 출간돼 패션과 미용과 관련한 글과 사진을 다뤘지만, 일제 식민지 시절인 1920년대 한국에서는 화장에 대한 관념이 극히 미미한 편이었다. 잡지 발행 축하글을 실은 영제병원장 김두영의 글에 따르면, 사람들이 화장하는 사람들을 두고 풍류남녀의 야비한 행색이라고 무시하며 조소했다고 한다. 그런 시절이었음에도 ‘한국판 미용잡지’를 강력하게 호출한 이가 있었다.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현희운(1891~1965)이다.

소설가 현진건의 당숙이기도 한 현희운은 예명 ‘현철’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는 근대극운동의 선구자로 일본 유학 뒤 셰익스피어의 등을 국내 최초로 알리고 외국 문화 사조와 작가, 작품, 이론 등을 소개하고 번역했다. 수십 편의 글을 바탕으로 현희운은 문학론과 연극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는 화장과 미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여겨진다. 신현규 교수는 현희운이 일본에서 연극 공부를 하며 무대화장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했으리라 추측했다. 현희운은 화장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고 남성들도 화장을 해야 한다는, 당시로서 급진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현희운은 ‘조선에 처음 있는 화장품 연구소’라는 경성미용원 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경성미용원은 미용연구소로, 현희운은 이곳에서 화장품이나 미용도구를 발명하곤 했다. 그는 화장품이란 용어는 일본어를 번역한 것으로 화장품을 포함한 전체 표제는 ‘향장품’이어야 한다며 용어의 개념을 정리하고, 한국인의 피부에 맞는 제품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성미용원에서는 화장품뿐 아니라 여드름 짜는 기계 등 미용기구도 개발해 판매했다. 기술이 부족한 터라 제품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고, 화장품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미미한 터라 경성미용원은 사세가 금세 기울었다. 그럼에도 현희운은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을 창간하는 데 이른다.

신현규 교수는 “당시 미용잡지라는 것 자체가 생소했는데,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문답을 해주고 화장품의 개념을 정리한 점 등에서 선구적이었다. 이후로는 ‘미용’이나 ‘화장’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 사료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유사 잡지 또한 나오지 않은 것을 보니 이 영역에 관심 있는 사람은 당시로선 현희운밖에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근심생’ 질문의 답변 담긴 2011년

한국판 2011년 3월호에는 ‘탈모에서 탈출할 수 있는 궁극의 방법’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 앞부분에 실은 대구 사는 ‘근심생’이라는 여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21세기 잡지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100년 가까이 지나왔음에도 아름다움을 향한 사람들의 열정과 고민은 여전한 셈이다. 기사는 탈모의 다양한 원인과 초기 약물 치료법, 모발 이식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답변을 전했다. 그렇다면 에서는? “머리털이 나게 하는 화장품이 여러 가지가 잇지만은 그중에도 라프사알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헤야포마아드가 효력이 만슴니다. …이것은 가정에서 만드라 쓰시기가 좀 거북한 까닭에 분량은 말슴하여드리지 안이함이라다만은 만일 아실야고 하시면 다시 기별하여드리겟음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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