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영화의 선구적 작품과 이후의 수많은 퀴어영화가 판타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장르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척되었음을 방증한다. 판타지와 현실 사회. 얼핏 둘을 연결하기가 어려워 보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케네스 앵거의 (1947), 장 주네의 (1950)에서 게이의 사랑은 현실의 그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억압을 상징하듯 폐쇄 공간에서 꿈, 환상을 빌려 동성애자의 욕망을 표현한다. 판타지는 현실을 부정할 때 동원되는 세계다. 퀴어영화의 감독이 동성애자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판타지를 끌어들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비극적 멜로, 한국 퀴어영화의 전통
반면 한국의 본격 퀴어영화는 어쩔 수 없이 리얼리즘의 전통 아래 만들어졌다. 한국 영화의 역사가 리얼리즘을 근간으로 형성된 까닭이다. 판타지에서 비롯돼 다양한 장르로 가지를 뻗친 외국의 퀴어영화와 달리, 리얼리즘은 한국 퀴어영화의 발목을 잡는다. 김경묵의 영화 같은 일부 예외적 존재를 제외하면, 한국 퀴어영화는 꿈에 빌붙을 것도 없이 곧장 현실로 진입해야 했다. 퀴어 중·단편 3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 에서 게이의 사랑은 숨겨야 하는 것, 우울한 것, 말할 수 없는 것, 양보해야 하는 것, 사라져야 하는 것, 묻어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김없이 실패할 운명을 띤다. 눈물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국 퀴어영화가 비극으로 끝나는 건 필연이다.
그런 점에서 김조광수가 쌓아올린 영화의 연대기는 각별하다. 퀴어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먼저 알린 그는 몇 년 전부터 단편영화를 직접 연출하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영화제 예심에서 나는 그가 출품한 단편영화를 몇 차례 떨어트린 바 있다. 그가 선보인 단편영화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했다. 판타지 뮤직비디오 같은 그의 단편이 영화라 이름 붙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6월21일 그의 장편 데뷔작 (이하 )이 개봉했다. 극장을 나서며 든 첫 생각은 ‘김조광수가 이제 감독이 되었구나’라는 것이었다. 눈물과 웃음의 멜로드라마를 구사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었다. 이어 그가 예전에 만든 단편영화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닭살 돋는 뮤직비디오형 단편영화는 김조광수가 일찍이 도모한 고도의 전략으로 읽힌다. 그는 퀴어영화를 이성애자에게 접근시키려는 발칙한 음모를 꾸민다. 그러자면 퀴어영화가 먼저 대중적 장르로 변신해야 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기존 한국 퀴어영화는 소수자의 인권에 관심을 가진 몇몇 관객과 소통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만큼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김조광수는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퀴어영화와 상업영화의 결합을 통해 더 폭넓은 관객과 소통하는 게 급선무임을 일찌감치 깨달았지 싶다. 게이들은 일반인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이반’이라 부른다. 김조광수는 이반 전용의 우울한 멜로드라마 따위는 만들 마음이 없다고 선언한다.
은 퀴어영화의 커밍아웃이다. 그 커밍아웃이 그냥 이뤄진 건 아니다. 도시 여성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 라면, 현대 게이에게 그러한 작품은 다. ‘퀴어 애즈 포크’의 뜻인즉 ‘평범한 이웃 같은 동성애자’ 아니던가. 지하 문화에 머문 옛 게이들과 반대로 류의 문화를 흡수한 한국의 수많은 젊은 게이들은 더 이상 숨기를 거부한다. 그런 상황을 반영해, 사회변혁운동의 일원으로 얼굴을 내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군의 젊은 게이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이 나왔다. 의 한 일화를 극중 삽입하기도 한 은 변화의 바람에 친밀한 미소로 응한 작품이다.
새 세대 퀴어의 행복한 커밍아웃
표면적으로 은 TV에서 흔히 접하는 멜로드라마와 로맨틱코미디의 공식을 답습한다. 중산층 도시인의 생활을 전면에 부각시킨 장면을 보노라면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법은 거기서 일어난다. 은 TV 드라마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동성애자를 대입함으로써 관습을 흔든다. 익숙한 드라마와 코미디에 빠져들어 울고 웃다 보면 어느새 ‘전쟁하듯 사랑하는 동성애자의 실체’를 절감하게 된다. 은 에두르지 않고 게이로서 당장 행복하지 않으면 죽겠다고 말한다. 흑인운동의 중심에서 제임스 브라운이 ‘나는 흑인이야, 그리고 당당해’라고 노래한 것처럼, 김조광수는 ‘나는 게이야, 그리고 행복해’라고 주장한다. 뻔뻔하다고? 그동안 당신이 했던 짓을 생각해보라. 이 흥행에 성공한다면 두 가지를 성취하게 된다. 첫째 퀴어영화가 잃어버린 ‘행복’의 의미를 되돌려줄 것이고, 둘째 대중과 퀴어문화의 행복한 동거에 한 발짝 다가설 것이다. 즐거운 발걸음에 당신도 동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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