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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다른 종이 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에일리언 비키니>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SF 영화… 미지의 존재를 통해 인간을 재조명하다
등록 2011-08-26 18:11 수정 2020-05-03 04:26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주)이심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주)이심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미확인비행물체(UFO)의 존재를 탐구해온 사람에게 중요한 가설이 있는데, 고대 숭배교나 중세의 마녀사냥, 근대의 성모 현시 등 역사적으로 신비한 현상은 대부분 UFO나 외계인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다. 수천년 동안 똑같은 외계의 빛이 우리를 찾아왔다고 가정하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신으로, 어떤 사람들은 추악한 난쟁이로 여긴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지금 우리는 미지의 존재를 무어라 부르고 있을까? 공상과학(SF) 영화는 곧잘 인간 아닌 존재를 괴물로 다루지만, 최근 인간과 다른 종을 그린 SF 영화들이 개봉했다.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외계인 사회

1968년 찰턴 헤스턴의 영화 에는 텅 빈 눈빛의 사람이 나온다. 유인원이 주인인 행성에 길들여진 여자다. 2011년 루퍼트 와이엇 감독의 에는 텅 빈 눈빛의 유인원들이 나온다. 그러나 유인원들은 빛나는 눈빛으로 거듭난다.

앞서 나온 4편의 시리즈에서 고릴라들은 인간을 마음껏 사냥하고, 유인원의 뇌를 연구하려고 인간의 뇌를 파헤친다. 영화 속 사람의 목숨은 지금의 (사람을 제외한) 영장류 운명만큼이나 무가치하다. 인간들이 전두엽이 잘려 식욕을 느끼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대뇌피질을 손상당해 모성애를 잃고 자식을 내팽개치는 대목은 어쩐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고릴라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정확히 인간사회의 복사판이다. 2011년판 은 인간에게 원죄를 묻는다.

<E.T>. UPI 제공

. UPI 제공

주인공 시저는 실험용 침팬지이던 엄마한테서 신약의 효능을 물려받아 진화된 침팬지로 태어난다. 뛰어난 지능과 야생성이 공존하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실험실의 피조물이라니. 이건 단순히 의인화가 아니다. 시저는 사람이라는 종도 매혹시키는 존재다. 루퍼트 와이엇 감독은 제작 뒷이야기에서 “우리는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유인원을 유인원 그대로 그리고 있다. 그들은 무슨 로봇이나 흉내만 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건 진짜 침팬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간 세상을 직관하고 좌절하는 시저의 눈빛을 지켜보던 ‘사람 관객’은 영장류의 섬세한 표정과 감정을 느끼는 경험을 한다.

“(유인원들이) 처음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이 복종을 요구했을 때,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1963년 나온 피에르 불의 원작 소설의 한 대목을 충실히 구현한다. 와이엇 감독은 “인간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일 수 있으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배척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리지널 시리즈의 주제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여기 괴물이 아니라, 다른 종이 있다. 정복하거나 제거하려 들어도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정복전쟁을 포기한 SF 영화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이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인 교감이 파괴된 세계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영화라면, 이에 앞서 구별짓기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영화 도 있었다. 2009년 개봉한 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사회에서 배척당한 흑인 공동체를 외계인 수용구역에 격리된 외계인의 처지에 빗댔다. 지난 8월11일에는 외계인에게 느끼는 매력과 공포를 초콜릿에 버무린 세대를 위해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2년 영화 가 영화관에서 재개봉돼 한 달간의 장기 상영에 들어갔다. 최근 개봉하는 외계인 영화들이 한편으로는 지난 세대의 향수에 기댄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에일리언과 비키니>. (주)인디스토리 제공

<에일리언과 비키니>. (주)인디스토리 제공


영화가 다양한 층위에서 외계인을 통해 묻고 싶었던 것이 결국 ‘인간은 누구냐’ ‘우리는 지금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느냐’라면, SF 영화 속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에서 시저를 인격을 갖춘 존재로 키운 로드만 박사(제임스 프랭코)는 시저에게 “나를 믿어, 해결할 수 있어”라고 장담하지만, 실험실 밖에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시저의 전쟁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인간이 도리어 괴물이 아닐까

지난 8월18일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에서 공개된 에는 사람을 닮은 외계인 여자와 외계인을 닮은 남자가 나온다. 도시지킴이를 자처하는 영건은 불량배에게 시달리는 어떤 여자를 구하는데, 실은 그 여자가 외계인 감시단에 쫓기는 에일리언이라는 설정이다. 영화는 현실을 뒤집는다. 오늘 밤 내로 지구 남자와 관계를 맺어 외계인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는 에일리언 여자와 결혼하기 전엔 아무하고도 몸을 섞지 않겠다는 순결 서약을 했던 영건은 밤새 몸싸움을 벌인다. 영화를 만든 오영두 감독은 “아름다운 여자가 사이코 같은 남자를 공격함으로써 SF 장르의 관습을 뒤집으면 어떨까” 생각했다며, “여자가 우주에서 찾아온 외계인이긴 한데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도 아니고 공격성도 없다. 남자를 고문하는 것조차 끔찍하지 않고 귀엽다”고 했다.
종의 목적이 다른 두 남녀의 실랑이는 점점 사도마조히즘(SM)에 가까운 행각으로 번진다. 초반에는 여자가 공격하고, 후반에는 영건이 우세하다. 강간이라도 당하든가 죽든가 택해야 할 지경에 몰리자, 바른 생활 청년 영건이 뜻밖에 공격성을 드러낸다. 우주의 어떤 블랙홀보다 어두운 폭력의 기억 때문이다. 여자를 보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잠재된 폭력성만 드러내고 마는 인간에 비한다면야 종족보존 목적에 충실한 외계인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우리 마음속엔 괴물이 산다. 고릴라도, 외계인도 깜짝 놀라 도망갈 무엇이 산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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