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역사를 즐기지 않는다면 역사의 모든 효용들은 무의미해진다. 그것은 음악·미술·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분야들을 의무감 때문에 또는 교양을 높이기 위해 마지못해 공부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제공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이 말에서,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공자의 말이 포개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러셀은 (푸른역사 펴냄)에서 이른바 ‘쾌락으로서의 역사 읽기’를 권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한 번도 마르크시스트인 적이 없던</font></font>
그에게 역사는 “힘들고 바쁜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여가 시간을 기분 좋고 유익하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중·고등학교에선 입시만을 위한 암기 위주의 역사 교육이 이뤄지고, 대학에선 대중과 소통하기보다 전공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 연구가 진행되는 한국 현실에서 러셀의 쾌락으로서의 역사 읽기는 분명 새로운 자극이다. “역사 읽기에서 얻어지는 최고의 쾌락은 우리가 특정 시대를 좀더 알고 난 후에야 얻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때론 특정 시대의 깊은 속살을 비추지만 친절한 각주는 독자의 이해를 거든다.
이 책은 원래 라는 이름으로 1943년에 처음 선을 보였다. 이후 1957년 라는 책의 대표 에세이로 재수록되기도 했는데, 국내에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러셀은 기원전부터 2차 세계대전기까지 특정 시대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역사를 에세이에 녹여냈다. 1~2쪽에 가까운 짧은 글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때론 날카롭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역사적 국면을 파고든다. 그 국면들 속에서 러셀은 자신의 색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령 그리스 크레타문명의 상층 계급은 사치스럽고 다소 퇴폐적이었다며, 세계 여러 나라가 퇴폐적이지 않으면서도 문명국다워지는 법을 배운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음을 유념하라는 대목은, 근대주의자인 지은이의 면모를 또렷이 보여준다. 또 절대 정신이 되고자 투쟁하는 헤겔의 역사철학이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같은 군인에게 호감을 가지며 독일의 민족적 허영심에 호소했다는 지적에선 이성주의자 러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과학적인 것의 결정판이라는 마르크스 이론이 실은 헤겔의 ‘정신’을 ‘생산양식’으로, ‘민족’은 ‘계급’으로 변화를 준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선, ‘단 한 번도 반동적인 시류에 몸담은 적 없지만, 단 한 번도 마르크시스트인 적도 없던’ 그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도드라지는 식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앙숙이었던 괴테와 베토벤 </font></font>러셀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낸다고 해서, 쾌락으로서의 역사 읽기라는 책의 본령이 시들지는 않는다. 지적 쾌락이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에서 흘러나오는 까닭이다. 다음이 그 예들이다.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로버트 오언과, 도스토옙스키와 바쿠닌을 유폐시킨 러시아의 잔인한 폭군 니콜라이는 서로 좋아한 사이였다. 니콜라이는 스코틀랜드의 뉴래너크에 있는 오언의 공장을 방문한 뒤, 러시아에 비슷한 공장을 세우게 했다. 오언이 이런 니콜라이에게 매료됐다는 것. 반면 서로 좋아했을 것 같은 쾨테와 베토벤은 앙숙이 됐다. 작곡가가 바이마르의 시인을 방문했을 때, 시인이 궁정 에티켓을 가르치려 했고, 분노한 베토벤은 자신의 고집대로 행동했다. 계몽주의자 볼테르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도 “짧은 기간 우정을 나눈 뒤 냉혹한 적”으로 돌변했다.
한편 2차 세계대전기에 쓰였지만 책의 곳곳에는 아직도 날이 벼려져 있다. 러셀은 마르크스의 가장 중대한 오류는 지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그는 “고대 그리스인의 지성이 최고의 수준에 머물렀더라면 산업혁명은 고대에 발생했을 것”이라 말하면, 마르크시스트들은 “노예 노동력이 저렴했기에 노동력 절감 장치 발명에 대한 동기부여가 사라졌다고 하는 대답을 할 것”이라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 “어떤 노예 노동력도 19세기 초 랭커셔 공장주들이 고용한 비참한 어린이 노동자들보다 저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러셀은 “노예의 죽음은 노예 소유주에게 경제적 손실이었지만, 임금노동자의 죽음은 고용주에게 손실이 아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며, “지성이 없다면 인간은 기계의 도움으로 노동력을 절감하는 법을 결코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지성의 생성이 부분적으로 생물학적·개인적 원인에 있다고 할 때 러셀은 영락없는 우익이지만,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은 정신박약자가 그러하듯 평균적인 사람과 다르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한 철학자의 역사적 낙관주의</font></font>전쟁과 학살의 시절에 쓰여진 이 책은,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와 개인주의 옹호, 발전의 믿음으로 견결하다. “인간은 늘 그렇듯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다. …오늘날의 폭력은 주로 조직적으로 그리고 정부 주도로 행해진다. 또한 원시 시대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우발적인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보다는, 정부 주도의 폭력을 종식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기가 한층 더 용이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할 때,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이성과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갈망했던 한 철학자의 역사적 낙관주의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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