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있다/ 사람은 산다/ 살아 있는 날만/ 그리고 대뇌와/ 성기 사이에/ 사람들 세상이 있다…” 황지우 시집 에 실린 시 ‘이준태(…)의 근황’ 중 일부다. 이 시어를 받아 소설가 김연수는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모두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고 시대평을 남긴 일이 있다. 지난 8월14일까지 서울 홍익대 앞에서 열린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서는 이 시를 주제로 삼아 ‘그리고 대뇌와 성기 사이’ 미디어아트 장르전이 열렸다.
<font size="3"><font color="#991900"> 욕망 아닌 고통을 들여다보다</font></font>
대뇌는 잔뜩 찡그렸다. 가뜩이나 박경신 방송통신심의위원이 블로그에 성기 사진을 올리고 “이 사진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되는가”라고 물었던 참이다. 이번 미디어아트전에서 대뇌가 화끈 달아오를 만한 ‘과도한 성기 노출과 무분별한 성행위 장면’을 담은 단편 4개와 중편 1개 작품이 상영됐다. 그럼에도 이 성기 언어들의 난전은 딱히 누구의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보자.
칠순쯤 돼 보이는 한 노인이 방으로 들어온다. 카메라 앞에 서서 바지를 내리고 자위행위를 시작한다. 이상우 감독의 는 노인들의 외로움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전체 영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번 미디어아트전에서는 어떤 노인의 자위행위 장면만을 상영했다. 영화 를 연출한 이 감독은 2008년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정말 외로울 땐 방에서 혼자 자위행위를 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촬영이 시작됐다. 7분짜리 단편영화의 시간은 한 노인이 지지부진한 자위를 끝내기에는 모자라고, 지켜봐야 하는 관객에게는 턱없이 긴 시간이다. 감독조차 좁은 방 한켠에 카메라만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관객은 성기보다 더 외로운 노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기가 힘들다. 흥분 대신 슬픔이, 어쩌면 권태가 밀려든다. 감독은 자위행위 장면 절반을 잘라서 전반과 후반을 거꾸로 편집했다. 실제로는 자위행위를 끝낸 할아버지가 옷을 입는 장면인데 거꾸로 돌려서 옷을 벗고 있는 듯 보인다. 이상우 감독은 “노인들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회춘의 욕망을 나타내기 위해서 거꾸로 편집했다”고 설명했다. 관객은 저도 모르는 새 처음과 끝이 다를 바 없는 공허한 욕망의 순환선에 탑승하는 셈이다.
김경묵 감독의 영화 은 결과적으로는 의 대칭과도 같은 작품이다. 에서 노인의 표정과 손짓에 주목하던 관객은 이제 시선을 어디로도 돌릴 곳이 없다. 2005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됐던 이 영화는 두건과 모자로 얼굴을 가린 두 남자가 20여 분 동안 성행위를 벌인다. 감독의 실제 동영상이라는 설명이 없어도 그 자체로 충격적인 시각 효과를 주는 장면이다. 관객은 꼼짝없이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며 격렬한 혐오와 충격에 갇히게 된다. 김경묵 감독은 “타인의 성기나 성행위를 몰래 훔쳐보는 행위를 거꾸로 뒤집고 싶었다. 보는 사람이 폭력성이나 타자화되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할 의도였다”고 했다. 요약하면, 성기 노출과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영화들은 아이돌 가수들의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춤만큼도 섹시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타인의 성기와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font size="3"><font color="#991900">금기된 성애적 지식의 해방을 위해</font></font>한때 예술가들이 몸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성기를 드러내는 퍼포먼스가 흥했다. 이번 미디어아트전에서는 그런 저항의 선두주자인 발리 엑스포트의 영화 , 애니 스프링클의 등도 상영됐다. 애니 스프링클은 섹스에 얽힌 쾌락과 창의성을 드러내려고 직접 옷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섰던 작가다. 저항의 시대는 끝난 걸까. 2008년 로런스 위너가 만든 는 성기 언어가 처한 지루한 현실을 읊는다. 감독은 뉴욕에 있는 스위스 문화원에 50명이 모여 난교를 벌이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다시 그 장소에서 전시했다. 청결하고 문화적인 공간에서 누군가는 쾌락을 추구하고, 누군가는 관망하고, 누군가는 묘기를 부리며, 또 누군가는 시를 읊는다. 관객은 신기한 체험을 한다. 성기와 심지어 항문까지 노출하는데도 ‘예술 프레임’에 속하는 한 더없이 청결하고 예술적인 아우라를 풍긴다. 미디어아트전을 기획한 양지윤 큐레이터는 “미술이라는 담론 안에서 섹슈얼리티가 얼마나 보호받아왔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풀이한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노골적인 성기의 언어를 돌아볼 이유는 무엇일까. “금기된 성애적 지식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는 조르주 바타유의 말은 아직 유효할까. 포르노그래피가 주는 판타지를 벗겨내면 초췌한 성기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포르노그래피적인 예술활동을 해온 미국의 제프 쿤스는 몇 년 전 아내와 자신이 성교하는 장면을 전시했다. 그때 한 비평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했다”는 말을 남겼다. 이 일화를 소개한 양지윤 큐레이터는 “이제는 다양성을 숙고하기 위해서 성기의 언어를 돌아본다. 노인과 게이와 레즈비언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알기 위해서 이 기획전을 열었다”고 했다. 미디어아트 진영에서 성적 표현은 바야흐로 다양성의 존재론을 향해 가는 참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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