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엄숙한 옷을 벗은 죽음과 마주서다

저 편의 세상을 만지고 체험하다… 만화 <신과 함께>의 세계를 재현한 ‘저승,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전
등록 2011-07-15 18:51 수정 2020-05-03 04:26

서울 종로구 대학로 꼭두박물관은 죽음을 길잡이하는 곳이다. 7월16일부터 꼭두박물관에서 저승에 대한 색다른 길잡이 전시가 열린다. 네이버 웹툰에 연재하는 만화 에 등장한 저승세계를 재현하는 ‘저승,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전이다. 전시 기획자를 상대로 사전 취재했다.

이승보다 친밀한 저승의 얼굴

꼭두박물관 전시장으로 들어선 관람객은 돌연 죽음과 마주친다. 무사·봉황·용 모양으로 상여에 붙어다니는 꼭두들이다. 죽음을 길잡이하는 작은 나무 형상들과 눈길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처럼 저승은 공포의 극이다. 그런데 정말 저승이 개똥밭만도 못한 것일까.

만화 <신화 함께>가 그리는 저승의 첫 관문 도산지옥.

만화 <신화 함께>가 그리는 저승의 첫 관문 도산지옥.

한국인의 저승세계는 엄격하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거나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준 일이 없는 사람은 첫 번째 도산지옥에서 칼날이 선 다리를 밟는다. 두번째 화탕지옥에서는 끓는 물이 기다린다. 부모 가슴에 못 박은 죄, 남을 속인 죄, 남의 남편이나 아내를 넘본 죄, 술 마시고 주사 부린 죄 하나쯤 누가 피해갈 수 있겠는가. 기자라면 살아생전 잘못 놀린 혓바닥을 집게로 뺀다는 발설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해야 마땅하겠다. 만화 는 한국인의 저승길을 현대식으로 재포장했다.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의 저승세계는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정체돼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이승은 언제나 저승을 향해 열려 있고, 저승은 언제나 이승을 닮은 세계였다.

만화 속 주인공 김자홍씨는 2009년 겨울에 죽는다. 스트레스와 과음 때문에 일찍 죽지만 평범한 인생이다. 40년 인생을 다 적어봐도 A4용지 3장을 못 채운다. 딱히 기억날 만한 나쁜 일도 안 했지만 특별히 남에게 베푼 것도 없다. 49일 동안 7번의 지옥을 건너가야 하는 칼날 같은 운명 앞에서 믿을 거라곤 국선변호사 한 명과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저승식 농담뿐이다. 그래도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저승길이나 터무니없는 강 정비사업으로 어지럽혀진 저승의 강을 건너기엔 그만해도 충분하다. 이승에선 썰렁할 법한 농담도 삼도천 너머에선 큰 웃음을 준다. 만화 가 그리는 저승세계는 이승에서 못다 짜낸 재치와 지혜가 통하는 세계다. 게다가 찌질한 인생에게 자비를 베풀 줄도 아는 세계다. “한 명의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을 세웠다는 지장보살은 만화 속에서 지략 넘치는 변호사의 모습으로 환생했다. 만화를 그린 주호민씨는 “지장보살의 신앙에서 빌려왔지만 내가 원하는 한국 사회 엘리트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라고 했다.

광고

스마트한 사후세계 여행
지옥대왕 '시왕도'의 일부분.

지옥대왕 '시왕도'의 일부분.

‘저승,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전은 이승을 닮은 만화 속 저승의 친근한 얼굴을 들이민다. 전시는 만지고 볼 수 있는 저승 체험에 주안을 둔다. 꼭두와 상여를 거친 관람객은 저승 가는 배를 타야 한다. 저승길로 들어서는 미디어룸에는 술병들이 달려 있고 맞은편에는 배를 타고 삼도천을 건너는 화면이 비춰진다. 관람객이 무심히 술병을 건드리면 삼도천이 흔들린다. 작정하고 두드린다면 언뜻 풍경 소리 같기도 하고 노랫가락 반주 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삼도천은 고요해졌다가 일렁이기를 반복한다. 술병이 울리는 간격, 세기, 높낮이가 화면을 자극한다. 술병을 두드리는 세계는 현실이고 화면은 저편의 세계다. 이승에서 업을 쌓고 덕을 쌓듯 술병을 두드린다. 왜 하필 술병일까. 전시에서 미디어아트를 맡은 한민석 서강대 교수에 따르면 “만화 속 주인공이 술을 하도 먹어 술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란다. 다시 죽음은 엄숙한 옷을 벗는다. 한 교수는 “죽음을 유머를 위한 터전으로 삼으면서 긴장을 풀었던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주목했단다.

전시장의 저승은 지옥대왕 7명이 지배하는 세계다. 이 대왕들도 관객과의 상호작용에 맞춰 숨을 쉬고 소리를 높인다. 모니터 앞에 서면 증강현실로 구현된 대왕들이 입체 형상으로 나타난다. 다가서면 커지고 멀어지면 작아진다. 관객은 진광대왕·오관대왕·염라대왕들을 키울 수도 줄일 수도 있다. 게다가 관객은 염라대왕을 기울일 수도 뒷모습을 들여다볼 수도 빙글빙글 돌릴 수도 있다. ‘사후세계 여행’이라는 오래된 신화가 스마트한 기술을 만났다. 만화에선 저승이 사람이 만들어가는 현실적인 이야기였다면, 전시장에서 저승은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볼거리가 됐다.

“이승이 더 지옥같은 세계가 됐다”

저승을 다녀온 뒤 만나는 바깥세상은 어떤 모양일까. 는 3부작이다. 저승편에 이어 이승편을 연재하고 있으며 신화편이 연재될 예정이다. 이승편은 철거에 맞서 집을 지키는 가택신들의 싸움을 그렸다. 철거용역과 개발독재는 신보다 힘이 세다.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다. 작가는 “저승은 이승을 닮았지만 공정한 재판을 받는 세계로 그렸다. 그런데 현실을 닮게 그리다 보니 이승이 저승보다 더 지옥 같은 세계가 됐다”고 돌아본다.는 영화사와 일본 출판사 등에 판권이 팔렸다. 일본 격주간 만화잡지 에 일본 작가의 그림으로 연재될 예정이며, 내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진다.

광고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2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