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리는 좀비인가, 아닌가

좀비의 타자성을 의심하는 별난 좀비물 <이웃집 좀비>
등록 2010-02-10 16:58 수정 2020-05-03 04:25
〈이웃집 좀비〉

〈이웃집 좀비〉

대저 좀비란 무엇인가? 부두교에서 조지 로메르를 거쳐 의 계보를 훑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은 삼중적 의미의 ‘타자’이다. 첫째 기괴한 모습의 혐오스런 존재이고, 둘째 이성이나 감정이 없는 비주체이며, 셋째 인간을 잡아먹고 전염시키는 적대자이다. 첫 번째 인종주의적 타자성은 1960년대 이후 극복돼야 할 것으로 성찰됐지만, 두 번째 정신의학적 타자성은 현재까지 사회적 합의에 달하지 못했으며, 세 번째 적대적 타자성은 그보다 훨씬 해소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말할 것 없이 박멸 대상이다.

영화와 게임에서 그들은 무차별적 가학의 리비도를 뿜을 수 있는 대상이다. ‘그들’은 ‘우리’의 사지와 내장을 뜯어먹는 존재이고,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머리통을 날리더라도 눈곱만큼의 죄의식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들’과 ‘우리’의 경계가 그리 확고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물리는 순간 ‘우리’ 역시 ‘그들’이 된다. 하지만 질펀한 피의 쾌락을 즐기는 텍스트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진 않는다. ‘우리’는 “내가 물리면 똑같이 쏘아달라”고 말하는 ‘소~쿨’한 태도를 보이며, ‘우리’는 잠시 슬퍼하다가 감정을 돌아볼 틈도 없이 다시 밀려드는 좀비들과 살육의 향연을 즐긴다.

그들과 우리의 구분이 그렇게 명쾌한가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울까? ‘그들’과 ‘우리’의 구분이 물린 순간 명쾌하게 갈릴 수 있을까? 내 가족과 애인이 물렸을 때, 그들의 타자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은 별난 좀비물들이 있다. (2004)가 그러했고, 문화방송 (하늘도 웃고 땅도 웃고 사람도 웃고)의 ‘좀비’가 그러하고, 한국 초저예산 독립영화 (오영두·류훈·홍영근·장윤정 감독)가 그러하다. 가 좀비를 사회적 루저로 그리며 공존을 모색한 최초의 작품이라면, 의 ‘좀비’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좀비를 통해 타자성을 반문하는 코미디였다. 영화 은 이러한 의문을 더 멀리 밀고 나간다.

의 좀비는 시체가 아니라 감염자이며, 그들은 한쪽 눈만 변한 상태의 중간기를 갖는다. 그렇기에 애인이, 어머니가 좀비가 되었을 때 간단히 그들을 포기할 수 없다. 애인은 남아 있는 한쪽 눈을 잡아당기며 절절한 사랑으로 자신도 좀비가 되겠다 하고, 딸은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를 봉양한다. 오히려 타자성은 죽고 죽이는 전쟁 상태가 아니라, 평화가 도래했을 때 더욱 드러난다. 감염자였던 이들은 ‘정상성’을 획득했지만, 사회에서 배척받고 죄의식의 함입을 요구받는다.

좀비는 다름 아닌 ‘소수자-우리’

는 제목부터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공존의 대상인 ‘이웃’과 박멸의 대상인 ‘좀비’가 맞붙은 제목에서, 좀비는 다름 아닌 ‘소수자-우리’이다. 영화는 ‘오타쿠’와 ‘폐인’으로 명명되는 소수자성을 돌아본다. 첫 에피소드에서 방 안에 처박힌 오타쿠는 그를 잡아끄는 방의 인력으로 좀비가 되어 자기 신체를 뜯어먹음으로써 자폐성의 극한을 완성하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에선 이를 메타적으로 고양시킨다. 마감에 임박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호스로 소변을 받아내며 ‘폐인성’의 궁극을 보여준다. 그는 좀비인가 아닌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혹은 읽고 있는 ‘우리’는 좀비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던지는 는 2월18일 개봉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