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서른이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스물아홉과 서른 사이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대황하보다 넓은 강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고. 둘 사이에는 단지 ‘하룻밤’이 존재할 뿐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다르지 않듯, 스물아홉과 서른은 그리 다르지 않다. 유일한 차이라면 연령 제한에 걸려 몇몇 공채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사실뿐. 하지만 안심하라. 인생에, 특히 지금 말하려는 사랑에 공채시험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스물아홉들은 오늘도 여전히 성장통을 앓고 있다.
먼저 결혼하면 적금 다 주기로 약속한 세 여자
연극 . 제목만 보면 왠지 다이아몬드 왕관 쓰고 순백의 웨딩드레스 입은 오월의 신부가 주인공일 듯한 샤방샤방한 러브스토리가 연상된다. 심지어 신랑을 기다리는 듯 여주인공 셋이 웨딩드레스 곱게 차려입고 있는 포스터까지 마주한다면 확신하게 될 지 모른다. 하지만 제목과 포스터로 이야기를 지레짐작하면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연극 는 로맨틱 러브스토리의 외피를 걸쳤을 뿐, 실은 스물아홉 처녀들의 성장통을 그린 이별 이야기다. 마치 단조가 아닌 장조로 구성된 이별 노래처럼.
주인공은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의 고등학교 동창 세연과 정은, 그리고 지희다. 학원 강사인 세연은 서울 변두리 동네 보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정은은 장차 신춘문예 등단하는 게 꿈이지만 현재는 ‘룰루’라는 필명으로 야한 소설을 쓰는 야설 작가다. 세연과 정은은 각자 말 안 듣는 학생들 때문에, 마감을 독촉하는 잡지사 편집장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은 둘 다 별일 없이 산다는 것. 별다른 걱정 없이,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연극은 별일 없이 살던 두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깨는 사건의 발생으로 시작된다. 직장 생활 한 번 안 해보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10년 장기 백조의 숙맥 친구인 지희가 느닷없이 결혼을 발표한 것. 축복해야 응당한 친구의 결혼이 이들에게 사건인 이유는 세 사람이 10년간 저축한 적금 때문이다. 셋 중 가장 먼저 결혼하는 사람에게 몰아주기로 한 결혼자금 3850만원을 고스란히 지희에게 빼앗기게 생긴 세연과 정은은 이제 양동작전으로 결혼자금 되찾기에 나선다. 남은 방법은 둘 중 하나. 친구의 결혼을 무산시키거나, 친구보다 더 빨리 시집가거나. 지희의 결혼식이 있는 6월1일까지 남은 기간은 정확히 한 달. 이제 세연과 정은은 ‘5월 안에 결혼하기’라는 일생일대 지상 최대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한다. 두 여자의 고군분투 결혼 정복기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연극에서 이들이 결혼에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혼인배 적금기 쟁탈전’이라 부를 수 있는 결혼자금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 또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듯, 연극 는 스물아홉 여성들의 이별 이야기니까. 애당초 이 작품에서 결혼이나 사랑은 이별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연극은 정은의 현재진행형 이별과 세연의 과거완료형 이별, 두 이별을 통해 스물아홉의 성장통을 말한다.
의 극작가 김효진은 대본 앞에 최승자의 시 ‘외로운 여자들은’의 전문을 옮겨놓았다.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누구에게도 이별은 아픔인 것을…그녀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별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외로운 사람’이건, 잠든 체하거나 잠들어버린 ‘그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건. 이제 막 5년을 사귄 남자에게 버림받아 쓰라린 고통을 겪고 있는 정은에게도,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나 이제 그 남자의 얼굴마저 가뭇가뭇해진 세연에게도 이별은 동일한 질량으로 다가온다. 스물아홉 다 큰 줄 알았지? 더 이상 성장판도 자라지 않는 다 큰 성인이지만, 그럼에도 스물아홉의 그들에게도 이별은 아프고 아플 뿐이다. 종국에 연극은 스물아홉의 이별 이야기를 넘어 성장통을 앓으며 한 뼘 더 성장하는 이들의 이별 대처법을 이야기한다.
2006년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시작한 연극 는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할 정도로 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작품. 소극장에서 중극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하던 이 88만원 세대들은 널따란 원룸을 새로 장만했다. 덕분에 초연에서 만날 수 있었던 풋풋함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세연과 정은, 지희 역의 김소진·장경희·홍배연과 재수 없는 ‘진상’ 선배부터 마마보이 ‘연하남’까지 1인6역을 소화하는 윤혁진까지, 네 배우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여전히 풋풋하다. 아울러 미세한 감정의 결을 잘 살려낸 대사들도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서울 대학로예술마당 2관에서 2월28일까지. 문의 02-3675-3677.
김일송 편집장 ilsong@sceneclu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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