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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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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세상에 어퍼컷 한 방

전직 복싱 챔피언과 오합지졸들의 인생 데뷔전, 연극 <이기동 체육관>
등록 2009-12-10 14:19 수정 2020-05-03 04:25
연극 〈이기동 체육관〉. 극단 모시는 사람들 제공

연극 〈이기동 체육관〉. 극단 모시는 사람들 제공

복싱이 국민스포츠로 추앙받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이야 피겨스케이팅, 골프 같은 고급 스포츠가 인기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맨몸뚱이에 ‘빤스’ 하나 걸치는 헝그리 복싱이 국민스포츠였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가. 드라마 과 의 30% 시청률은 당시 의 시청률에 비할 수가 없다. 홍수환, 유제두, 김성준, 장정구, 김득구, 유명우…. 이들은 지금의 ‘욘사마’도 부럽지 않은 최고의 한류 스타였다. 여기 또 한 명의 이름을 추가하자. 이기동. 기억을 스캐닝해봤자 소용없다. 실존 복서가 아니니까. 바로 연극 의 주인공이다.

무대 한쪽에는 사각의 링이, 맞은쪽에는 전면 거울이 서 있다. 그 사이로 샌드백과 스파링 용구, 갖가지 운동장비들이 즐비하다. 여기는 2009년의 삼양체육관이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이 체육관의 관장은 짐작했듯 이기동(김정호)이다. 이 추레한 체육관에 신입 관원이 들어오면서 공연은 시작된다. 공교롭게도 신입 관원의 이름은 이기동(김서원). 우연도 아니다. 어린 시절의 우상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니까.

그러나 그 옛날 어린아이의 우상이던 챔피언 이기동은 그곳에 없었다. 오직 한물간 복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왕년에 ‘미친 탱크’로 불리며 이름깨나 날리던 챔피언은 흑백사진 속에만 존재했다. 비운의 복서의 삶이 대개 그러하듯, 이기동도 선수 시절에 얻은 ‘펀치드렁크’로 인해 만성두통과 극심한 수전증에 시달린다.

퇴물 복서가 운영하는 체육관의 사정도 좋을 리 없다. 체육관은 운영난에 시달리고 관원들은 모두 오합지졸이다. 코치 마인하(차명욱)는 ‘삼류 쓰레기’ 복서에 불과하다. 상사의 말이라면 찍소리도 못하는 보험회사 직원 봉수(조정환)도, 불량학생들을 피해 먼 길을 돌아다니는 근담(신문성)도 한심한 인생이다. 미싱사인 애숙(문상희)도, 불량여고생 지선(강혜연)도 모두 별 볼일 없는 인생이긴 마찬가지. 그런데 이들이 답답한 세상에 어퍼컷을 날리려 한다. ‘전국 아마추어 복싱대회’에 나가겠다는 것. 그들 중에 이기동의 딸 연희(강지원)가 있다.

한심하고 별 볼일 없는 인생들

복서가 되려는 딸과 딸을 말리는 이기동의 갈등은 연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테마다. 못난 아비의 욕심은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외아들을 사각의 링으로 내몰았고, 사각의 링은 사자의 링이 되어 외아들을 집어삼켰다. 가정마저 붕괴됐다. 사정이 이러하니 딸의 꿈이 아비는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러나 자식을 꺾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 그들이 답답한 세상에, 답답한 인생에 한 방 어퍼컷을 날린다. 연극 은 이들 삼류인생의 복서 데뷔전이자, 인생 데뷔전이다.

무참하게 KO패 당한다 한들

실제로 체육관에서 2년 동안 관원 생활을 했던 손효원 작가의 경험은 작품에 그대로 묻어난다. 무대는 체육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사실적으로 구성됐으며, 배우들의 연기 또한 양식화되지 않아 진솔하게 다가온다. 오죽하면 관원 7명이 열을 맞춰 마지막 연습을 하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질까.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링 위에 오를 그들은 과연 멋진 데뷔전을 치를 수 있을까? 아쉽게도 연극은 바로 그 지점까지 보여준다. 그들이 KO승을 거두게 될지, 반대로 KO패 당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설사 무참하게 KO패 당한다 한들 상관없다. 도전하는 순간, 그들은 이미 챔피언이 됐으니까. 세상 모든 삼류인생들이여, 답답한 세상에 어퍼컷을 날려라. 대학로 소극장 ‘모시는 사람들’에서 12월26일까지 공연한다. 문의 02-741-6487.

김일송 편집장 ilsong@sceneclu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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