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소설(SF), 추리소설, 판타지, 공포문학 등을 다루는 장르문학 전문지 이 휴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간한 지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좌초한 셈이다. 의 휴간은 대단히 안타깝다. 국내 장르문학의 기반은 취약했지만, 최근 힘차게 일어서던 중이었다. 외국의 장르문학들이 줄지어 번역되고, 국내 작가들의 작품도 쏠쏠하게 등장했다. 은 그런 기회를 잘 잡았고, 대중문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잡지였다. 비록 마니아와 일반 독자 사이에서 어영부영하는 느낌이 있었고, 백화점식으로 잡다하게만 다루는 단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아쉽지만, 대중문화 잡지의 휴간이란 뉴스는 너무나도 익숙해서 기시감이 들었다. 내 서재에는 등 채 1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소멸해버린 과거의 장르문학 잡지들이 묻혀 있다. 한국에서는 장르문학 잡지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적이 거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서는 대중문화를 다루는 잡지가 제대로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 소수의 마니아들만이 보는 전문지가 아니라 주류에 진입해 만인의 화제가 된 대중문화 잡지는 영화 전문지인 이 거의 유일하다. 조금 시야를 넓힌다면 1970년대의 도 조금 고급스러운 문화지라고 할 수 있다. 가 독재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간당한 뒤, 자매지라고 할 이 나왔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나마 이 잡지들은 대중문화가 아니라 생활문화 전반을 다루는 품격 있는 잡지였다.
대중문화를 다루는 잡지는 거의 실패 일변도지만, 전문지들은 간혹 살아남는다. 80년대의 이나 이 그랬다.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은 대중문화만이 아니라 인문학 전반의 관심이 영화에 쏠리고 한국 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한때 성공가도를 달렸다. 대중문화를 주목하는 지식인이나 지성적인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을 읽어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왜 한국의 대중문화 잡지는 오래가지 못하는 것일까? 미국의 처럼 수십 년 동안 영향력을 유지하는 문화잡지는 애초에 불가능한 토양일까? 일단 외부적 환경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를테면 인구가 너무 적다거나, 경제 사정이 열악해 문화상품에 돈을 쓸 여력이 부족하다는 등등.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쏠림 현상이 심해서 그렇지, 영화 한 편을 1천만 명이 본다는 것은 어쨌거나 대단한 일이다. 얼마 전 문화방송 의 ‘무릎팍 도사’에 소설가 황석영이 나와서 한 말처럼 한국인은 전쟁 때에도 책을 발행해서 돌려보던 민족이다. 생계가 힘들어지면 의식주가 아닌 문화 소비를 줄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지만, 그래도 영화나 책 등은 가장 싸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이자 취미다. 미국의 1920년대 대공황 때 할리우드가 절정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다. 외부적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팔리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잡지를 제대로 못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해외에서 최고의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는 국내에선 평범한 남성지일 뿐이다. 도발적인 콘셉트로 주목받았던 나 같은 잡지 역시 바다를 건너오니 귤이 아니라 탱자가 되었다. 는 해외에서 망하기 이전에 이미 지루해졌고, 도 최근에는 조금 야한 남성지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첨단을 달리는 해외 잡지들이 한국에 오면 그저 화려하고 폼만 잡는 보통 잡지가 되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니까 언젠가부터 부록이 잡지 선택의 기준이 되어버릴 수밖에.
선발주자가 없으니 수위를 맞추기도 힘들어하지만 잡지가 안 팔리는 이유가, 단지 잡지를 못 만들기 때문은 아니다. 오래전 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영화, 만화, 음악 등 다양한 대중문화를 다루던 은 창간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점점 여성지처럼 변해갔다. 이유를 들어보니, 광고 때문이라고 했다. 광고영업에서 의 경쟁지는 다른 문화지가 아니라 와 였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를 주로 소비하는 집단은 20~30대 여성이고, 그들을 타깃으로 하는 광고를 받기 위해서는 패션이나 미용 등의 기사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에는 ‘문화지’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여성지나 남성지 틈에서 경쟁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대중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룰수록 광고가 줄어드는 기이한 현상 덕분에 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전문지보다는 대중문화 전반을 다루는 문화지가 더 힘들다. 소수의 마니아가 아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광고도 힘들고, 판매도 힘들고,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잡지를 만드는 일 자체다. 국내에 이렇다 할 전범이 없고 주류의 선발주자가 없다 보니, 기사의 수위를 맞추는 것이 어렵다. 처럼 비평지로만 갈 수도 없고, 처럼 화사하게 가자니 여성지와 경쟁해야 하고, 을 지향하자니 누가 주요 독자인지가 애매해져버린다. 영화나 음악 등 특정 장르의 마니아들이라면 구태여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문화잡지를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관심 있는 특정 분야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다루는 기사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모든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자니, 일반 대중의 눈높이와 전혀 맞지가 않는다.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한국의 문화잡지는 애초에 등장하는 일조차 힘들어진다.
게다가 국내에는 잡지를 하찮게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잡지는 말 그대로 잡다한 내용을 다루는 책이다. 그런데 그 잡다한 내용이란 대개의 경우, 특히 문화지의 경우는 전혀 몰라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것들이다. 있으면 인생이 풍요로워지지만, 없어도 별다르게 불편하지 않은 것들. 그나마 교양이나 지식을 위한 것이라면 효용가치가 인정되지만, 오락이나 휴식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라면 언제나 하류 취급을 당한다. 시간 낭비이거나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잡지를 보느니 책 한 권을 더 보라거나, 등산이라도 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라거나 등등. 식민지, 전쟁, 독재정권 등 어려운 현대사를 거쳐온 덕에 생존에 필요한 것이나 출세에 소용이 없으면 폐기처분하기 일쑤였다. 잡지, 그것도 대중문화를 다루는 잡지는 늘 쓸모없는 것의 하나로 치부됐다. 하지만 잡지는 습관이다. 읽는다고 해서 갑자기 지식과 교양이 업그레이드되지는 않지만, 꾸준히 읽으면 무엇인가가 채워진다. 즐거움도 더해진다. 그런 사소한 즐거움과 인생에 크게 도움되지 않는 소소한 지식이 잡지의 본령이다.
고상하고 우아한 것만 예술이다?한국에서 대중문화 잡지가 요절하는 것은 역시 사회적인 문제가 크다. ‘대중문화’ 자체가 천대받기도 하고, 대중문화를 편하게 즐기는 태도가 부족하기도 하다. 마니아들은 지나치게 완강한 장르의 순결성을 요구하고, 대중은 장르 자체를 즐기면서도 은근히 멸시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심각하고 진지한 것만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고상하고 우아한 것만 예술이요 문화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존재한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한국의 대중문화 잡지를 말려죽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환경’을 탓해보아도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건,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쉽게 손에 집어 읽을 수 있는 대중문화 잡지가 없다는 것. 그런 잡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화잡지가 망해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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