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선주문만 20만 장 넘긴 싱글 , 이 노련한 앨범은 왜 흥미롭지 않은가</font>
▣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7월29일, 서태지의 새 앨범이 발매되었다. 정확히 말해 ‘앨범’은 아니다. 서태지는 솔로 4집 앨범 를 발표하기 전 두 장의 싱글을 먼저 발표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번에 발매된 음반은 그 첫 번째 싱글이다. 란 제목 아래 리믹스 트랙을 포함해 4곡이 실렸다.
유일한 대안? 흠 좀 무서운데…
발매되기 전부터 이 음반은 뜨거운 감자였다. 실제로 선주문만 20만 장을 넘겼다고 하고, 발매 당일 판매 기록을 깼다는 소식도 들린다. 앞으로 발매될 정규 앨범이 침체된 음반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가 은연중 작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환상이다. 서태지 개인의 성과가 음반시장의 오래된 불황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환상.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몰이해와 지금까지 확대재생산된 서태지라는 아이콘의 신화화 덕분이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서태지가 ‘한국 대중문화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야말로 ‘흠 좀 무서운데…’란 생각이 들게 한다. 영웅주의에 대한 동경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엘리트주의를 합리화시킬 뿐 아니라 대중문화와 역사 발전의 맥락에 대한 왜곡을 낳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아직도 서태지에 대한 비판과 지지 담론들이 몇 년 동안 그대로라는 점이다. 1990년대 한국 청년문화·하위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경에 1992년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역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일종의 스위치였을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은 모두 ‘스위치’ 구실을 할 따름이다. 변화와 혁신을 이끌거나 말거나 주체는 언제나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이었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문제는 90년대 초반 연구자들이 이뤄놓은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적 성과들을 곡해하면서 서태지 개인을 음악적·문화적·사회적 이슈들과 결합시킨 미디어, 이를 마케팅 포인트로 적극 활용한 서태지 ‘측’의 전략이다. 서태지에 대한 평가가 음악보다 문화적 영향에 맞춰진 것은 그 때문이다. 서태지를 숭배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도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뿐더러 종종 그의 결과물은 필요 이상 과장된 채로 평가받았다.
사실 음악적으로 서태지는 그리 흥미로운 텍스트가 아니다. 사운드가 세련되고 깔끔하게 들린다는 것은 평가라고 하기엔 민망하다. 사운드의 질은 주로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좋은 장비와 좋은 녹음실, 좋은 엔지니어가 좋은 사운드를 만든다. 게다가 음질은 음반의 기본 요소다. 결국 ‘좋은 사운드’라는 건 자본과 숙련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평가는 사운드를 만들어낸 맥락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기술적 배경 외에 사회문화적 관점이 허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서태지의 음악은 서태지라는 개인보다 흥미로운 텍스트가 아니다. 이번 싱글도 마찬가지다. 싱글 커버가 시규어 로스의 99년 앨범 〈Agaetis Byrjun〉의 커버와 유사하고, 수록곡 중 (T’IKT’AK)은 시규어 로스의 2005년 앨범 제목 〈TAKK...〉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논란을 낳았기 때문이다. 서태지 본인이 ‘네이처 파운드’라는 장르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팬들이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할 것’이라며 발매 전부터 기대를 증폭시켰음에도 이 싱글은 흥미롭지 않다.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의 차용
장르는 결과물보다 선행하지 않으며, 사후에 포섭된다. 새 싱글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전자음이 삽입되었지만 수록된 3곡 중에 장르적으로 신스팝이나 일렉트로니카에 속할 정도로 곡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트랙은 없다. 신시사이저가 주로 활용된 ‘모아이’는 서태지의 가벼운 음색에 전기기타와 건반, 현악이 만드는 기본 사운드로 경쾌하게 서태지 스타일을 강조한다. 8비트 게임기의 뿅뿅거리는 효과음으로 시작되는 은 신스팝의 스타일을 빌려 익숙하고 안전한 감수성을 재현한다. 포스트 그런지 사운드의 맥락에 있는 은 보편적인 구성과 감수성에 머문다. 물론 노련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지나치다. 이스터섬의 고대문명, 인간이 되고 싶은 로봇의 꿈,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권력 등은 흔한 음모론을 답습하고,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한 노랫말은 서사보다는 단상으로 떠다닌다. 그걸 받치고 있는 세계관은 모호하고 미숙하다. 무엇보다 서태지의 음악은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의 차용으로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
사후적인 평가로 서태지가 혁신적인 문화 생산자의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그가 글로벌한 대중문화의 전파자일 때였다. 한국 사회가 인터넷이라는 개방 공간과 축적된 산업적 인프라를 통해 다양한 대중문화를 전방위적으로 수용하기 전인, 9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문화적 지위는 획득될 수 있었다. 새 싱글의 하이브리드적 실험은 글로벌한 관점에서 보자면 80년대 말부터 90년대를 통틀어 수행된 시도다. 서태지의 음악적 성과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혁신적이지 않다’가 아니라 누군가 이미 완성해놓은 장르와 스타일을 ‘성찰 없이 사용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장르적 토양이 부실한 한국 시장에서 서구의 노래·연주 스타일을 맥락 없이 차용하는 것이 서태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갱스터랩이나 이모코어를 포함해서 일렉트로니카 등의 기존 스타일을 ‘처음 유일하게 시도했다’고 포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미 신화를 관통했다
분명한 사실은 서태지가 이미 어떤 지점을 관통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를 비판하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혹은 숭배하는 것도 그의 현재 위치를 바꾸거나 변화시키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확고한 팬덤 위에 형성된 시장은 그를 환영하고 미디어가 그의 지위를 보장한다. 대중문화의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지금 여기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서태지 신화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신화화에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일련의 작업들이 대중문화의 자장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반응을 야기한다는 가능성 때문에 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환기다. 서태지의 음악보다 ‘서태지’가 흥미로운 텍스트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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