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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에 말하는 ‘반가족’

등록 2008-05-09 00:00 수정 2020-05-03 04:25

경순 감독 인터뷰… “항상 나를 불편하게 했던 질문들을 짚어보고 싶었다”

▣ 글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아빠는 집에서 TV만 본다. 동남아로 여행을 가겠다고 말을 꺼내자 후진국에는 볼 것도 배울 것도 없다며 선진국으로 알아보라고 한다. 올해 대기업에 입사한 언니는 공주처럼 먹기만 한다. 도통 자기가 먹은 것을 치우는 법이 없다. 종일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쉴 새 없이 일만 하는 엄마. 이웃집에서 보모로 일하며 낮에는 다른 집 아이들을 먹이느라, 밤에는 가족들 먹이느라 바쁘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는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막내딸 세영의 것. 촬영을 담당한 그의 카메라는 자신의 가족,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모습을 거칠지만, 사실 그대로 담는다. 그러면서 묻는다. “왜 엄마는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일만 할까?” 영화는 가족이란 이름 아래에서 당연시해온 어머니의 희생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 다른 주인공 경은. 22살 나이에 결혼해 새 가족에 편입된 30대다. 하지만 2년 전부터 남편과 떨어져 살고 있다.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희생을 강요하며 간섭과 모욕을 일삼는 남편·시어머니와 불화가 심하다. 이를 못 이겨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 수면제 수십 알을 입 안에 털어넣고 잠든 다음날, 그는 죽지 않고 정확히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평소 아침밥을 준비하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시집살이의 스트레스와 긴장이 수면제보다 강했던 것이다. 그는 지금 이혼하면 아들을 못 만날 것이란 시댁의 말에 이혼을 망설이고 있다. 경은이 느끼는 가족의 굴레는 20대 세영보다 한층 단단하다.

의 마지막 주인공은 경순 감독 본인이다. 그는 딸 수림과 단둘이서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산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가끔 아버지에 관한 설문조사를 해오라는 등의 과제로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을 강요당한다. 그 역시 ‘싱글맘’에 대한 사회적 편견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감독은 가족 안에서 훼손돼가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20대·30대·40대 여성의 일상을 통해 ‘가족’이란 집단의식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영화는 주인공과 스태프의 구분이 없다. 스태프 각각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카메라는 그들과 가족을 따라간다.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우리 이야기라는 복선을 깔고서. 5월8일 어버이날 개봉을 앞둔 경순 감독을 만났다.

이경순 감독으로 활동하다 이번에 성을 뺐다.

호주제 폐지운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부모 성을 같이 썼다. 나는 부모님 모두 이씨다. ‘이이경순’은 어색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냥 이경순으로 활동했다. 솔직히 부모 성 같이 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공정한 1인1적을 위해 가족과 떨어진 개인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작업하면서 의도적으로 성을 뺐고, 출연진과 스태프들도 이에 동의해 성을 쓰지 않았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반가정적 영화를 가정의 달에, 그것도 어버이날에 개봉하는 이유는 뭔가.

가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날,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게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이 ‘네’라고 할 때 혼자 ‘아니요’ 하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고.

영화의 출발점은?

살아오면서 느낀 점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이혼했다. 나는 그 점이 부끄럽거나 불편하지 않았는데, 항상 주변에서는 “경순이는 아빠와 사는구나” “힘들겠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 그게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같은 상황의 친구들을 봐도 비슷했다. 그 점을 짚어보고 싶었다.

영화는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이야기하며 혈연 중심의 가족을 비판한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감독도 일반 가족과 다르지 않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가는 것 같다. 딸 수림과의 관계 역시 감독이 비판하는 가족의 모습이 아닌가?

가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개인끼리 만나서 함께 사는 모습을 표현할 때 ‘가족’이라는 말 외에는 딱히 없다. 나는 딸 수림과 동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거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가족보다는 낫다. 딸을 낳았기 때문에 그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책임을 지고 보호해줘야 한다. 그것을 제외하고 일반 가족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와 딸의 역할이나 희생과 의무 등은 없다. 나는 수림의 친구가 되고 싶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다양한 형태들이 있다. 그것이 꼭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등으로 엮인 이른바 ‘정상 가정’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동성과 같이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은 싫지만 아이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이상하게 본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정말 행복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시비 걸 생각은 없다. 그런 분들은 지금처럼 살면 된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이 정상이라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세영이 유년 시절 엄마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누구나 한 번쯤 유년 시절 부모에게 맞을 때 극도의 공포를 느낀 적이 있을 텐데.

모든 폭력의 시작은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처음 폭력을 당하고 그 공포를 경험하는 곳은 학교나 직장이 아닌 가정이다. 우리는 학교·군대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가정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가족은 온화한 모습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자르기 싫다는 딸 수림의 머리칼을 직접 자르는 장면이 있다. 딸의 처지에서 이런 행동은 상당한 폭력이다. 영화를 통해 가족의 억압과 폭력성을 비판하는 감독으로서 이중적 모습 아닌가?

당연히 잘못된 행동이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지만 그런 불완전한 모습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수림은 당연히 그런 엄마가 폭력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리에 함께 있던 세영, 경은은 똑같은 장면을 보고 각자의 처지에서 다른 생각을 한다. 어릴 적 엄마에게 맞고 자란 세영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똑같다고 생각할 거고, 아들과 떨어져 사는 경은은 그렇게라도 토닥거리며 같이 지낼 수 있는 둘이 부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답은 없다. 그 다양한 시선을 보여준 거다.

영화제가 아닌 상영관 정식 개봉을 앞둔 심정은? 차기작 구상도 말해달라.

각각의 영화제에는 특수한 목적이 있다. 그곳에는 항상 준비된 관객이 있었다. 이번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차기작에서는 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본주의에 밀착된 여성의 문제, 이를테면 여성의 몸이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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