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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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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상상하라, 내가 당신이라면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국가인권위원회의 2008년 인권영화 시리즈

▣ 남다은 영화평론가

당신이 나라면? 아니, 내가 당신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말한다. 당신이 내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여기서 방점은 ‘내 입장’이 아니라 ‘생각해봐’에 찍힌다. 당신은 나의 입장에 잠시 서 있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 끝까지 나의 입장이 되어 함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뭇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이 수사는 사실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말이며,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그리 올바른 말도 아니다. 타자의 상황을 파악할 때 반드시 ‘그’를 ‘나’로 바꾸어, 혹은 환원해서 생각해야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 이를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그가 내 아버지라면, 그녀가 내 누이라면, 혹은 어머니라면…. 모든 문제를 가족화하거나 나의 위치와 연결지을 때만 타자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관용과 도덕, 윤리를 내세우는 건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자랑스러워할 일은 더욱 아니다. 그건 시스템을 바꿀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만큼 공허하고 무책임한 태도일 수 있다. 요점은, 타자의 타자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공존한다는 것은 휴머니즘이나 연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좀더 복합적이고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당신이었다면’(If I were you)이란 말은 나의 테두리를 지키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의 테두리가 부서질 각오를 하면서 하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작 우리의 문제는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시각장애인 다루는 시각예술의 딜레마

2003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해온 인권영화 시리즈는 각 작품들의 의도가 어떠하건 간에, 적어도 위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지점을 마련해주고 있다. 극영화 과 애니메이션 에 이어 2008년 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여섯 개의 주제들로 이뤄진 여섯 편의 애니메이션 모음이다. 각 팀들은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문제들을 직접 취재하고 그 속에서 함께 살면서 이야기를 구성했다. 이미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창의력을 인정받은 감독들이니만큼 작품들마다 여전히 개성 강한 스타일을 볼 수 있지만, 스타일의 고수가 섣불리 주제를 압도하지 않도록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우선 안동희·류정우가 공동 연출한 은 시각장애인 여성의 하루를 담는다. 어느 날 아침 소녀 앞에 나타난 요정은 눈이 다시 보이게 되는 것을 제외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영화는 요정의 팔을 붙들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상 구경을 시작하는 소녀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주인공 소녀가 볼 수 없는 세상의 시끌벅적하고 생생한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문득 궁금해진다. 실제 시각장애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애니메이션이라는 시각예술이 시각장애인을 다룰 때, 그것은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을 위한 것일까, 그들을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을 위한 것일까.

홍덕표의 는 이 땅의 소년들이 진정한 남자로 태어나기 위해 의심 없이 거치는 통과의례, 포경 수술에 유머러스한 태도로 의문을 제기한다. 전작 에서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을 얽매는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남성성을 대변하는 아버지와 소심한 아들의 불균형적인 관계가 남성다움의 껍질 바깥에서 점차 진짜 소통을 시작하는 과정이 인물들의 과장된 외모, 그와 대비되는 섬세한 내면을 통해 유쾌하게 표현된다.

이홍수·이홍민의 는 출산을 앞둔 직장인 여성이 남편, 가족, 직장, 사회 그 어디에도 의존하지 못하고 홀로 현실과 싸우는 모습을 그린다. 임신과 출산, 육아의 문제가 여자들에게만 전담되는 현실을 중심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임신부, 무책임한 남편, 출산휴가를 퇴직으로 여기는 회사,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떠맡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희생자인 노년 여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산한 인물들의 표정과 역동적인 스케치가 인상적이다.

성소수자의 절박한 거짓말

권미정의 는 이주 여성과 한국 남성 사이에 태어나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당면하는 문제들을 온기 넘치는 시선과 드로잉으로 풀어낸다. 여전히 편견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에서 필리핀 태생 엄마를 둔 소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구체적 과정의 묘사가 돋보인다. 엄마 역을 한 성우는 실제 이주 여성인데, 영화 속 그녀가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동적이고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당당한 엄마와 아내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민영의 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진짜 산타클로스에 선발되기 위해 분주한 산타들의 모습을 담는다. 하지만 과연 진짜의 기준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키가 작아서, 누군가는 너무 커서, 누군가는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누군가는 피부색이 달라서 선발되지 못하는데, 결국 가장 ‘정상’적인 조건으로 뽑힌 산타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짜라는 사실. 이 프로젝트에서 유일한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마지막으로 박용제의 은 그의 전작 에 이은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성애 중심의 견고한 울타리에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동성애자들의 고통과 선택이 다섯 명의 남자들을 통해 그려진다. 부모를 안심시키려고 계약 결혼을 하거나, 그렇게 해서라도 연인을 곁에 두거나,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지거나, 동료들의 섣부른 의심을 피하려고 거짓 연애를 하거나, 부모가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사람들. 단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숨기는 길을 택하고 마는 이들의 절박한 거짓말이 감독 특유의 풍부한 표현력으로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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