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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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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두근두근, 에반게리온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TV 시리즈를 4편의 극장판으로 ‘리빌드’ 하겠다는 안노 히데아키의 첫 작품

▣ 김봉석 영화평론가

가 드디어 개봉한다. 을 보고 팬이 되었다면, 가 어떤 연유로 나오게 되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1995년에 만들어진 TV 시리즈 은 모두 26화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완결은 아니었다. 아니 TV 시리즈를 본 사람들 모두가 25, 26화를 보고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 에바라는 거대 인조인간을 타고 사도와 싸우던 신지의 이야기가, 난데없이 신지의 사이코드라마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애초 구상대로 작품을 끝내기에는 제작비가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결말로 갔다는 말도 나왔고, ‘탈오타쿠’라는 제작진의 주제의식을 표현한 것이라는 후일담도 있었다. 진위가 어쨌든 간에 의 열광적인 팬들은 진짜 결말을 원했다. 결국 안노 히데아키는 1997년 TV판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 원했던 결말을 완성한 와 두 편의 극장판을 만들어 공개했다.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봐야했던 작품

은 2000년 세컨드 임팩트라는 대재난이 일어난 뒤, 여전히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2015년의 일본이 배경이다. 사도라는 이름의 괴수, 혹은 로봇들이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한다. 14살의 레이와 신지는 거대한 인조인간인 에바에 탑승해 사도를 물리쳐야 한다. 언뜻 거대 로봇물의 전형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은 일반적인 상식과 기대를 완전히 뛰어넘은 기이한 작품이었다. 14살의 소년 신지는 절대로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단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에바에 탈 뿐이다. 그것은 사춘기 아이들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디론가 무작정 가야만 하는 아이들의 불안한 심정이, 신지를 통해 드러난다. 또한 신지의 아버지가 속한 조직 네르프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의심스러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아니 에바를 둘러싼 모든 것이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단 하나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없다. 게다가 모든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 절박한 상황에서 폭주를 하기 일쑤다. 프로이트 심리학에 온갖 신비주의와 음모론을 끌어다 모은 듯한 스토리, 기존 로봇물과 특수촬영물을 인용한 설정과 장면 등 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총정리하는 동시에 새로운 지평에서 모든 것을 재구성했다.

그러니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다면, 팬이 아니라도 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95년 〈도쿄TV〉에서 방영이 시작된 은 일본에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고, 불법 복사판을 봐야 했던 한국에서도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당연히 을 봐야만 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은 에 이어 성인층에게 애니메이션이 확산될 수 있는 길을 연 위대한 작품인 동시에, ‘오타쿠’라고 불리는 일본의 열광적인 만화, 애니메이션 마니아의 현실적인 ‘능력’이 무엇인지를 증명한 탁월한 작품이었다.

12년 전과 같은 설정 다른 진행

그렇다면 극장판이 나온 지 10년 뒤에 다시 만든 는 대체 무엇일까?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만들어진 TV 시리즈나 OVA(Original Video Aninmation)를 리뉴얼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다. 오타쿠 팬을 확실하게 거느리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경우 음향을 5.1 채널로 업그레이드하고 영상을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하는 등 수정을 거쳐 리뉴얼판 DVD를 다시 내면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것이다. 도 리뉴얼판을 냈고, 역시 열광적인 팬이 다수인 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시장이 존재하는 걸작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리뉴얼판만이 아니라 후속편이나 외전을 만드는 것도 주요한 전략이다. 그런 이유로 의 새로운 극장판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일본에서는 에반게리온을 캐릭터로 사용한 파친코가 인기를 끈 것에 편승해 수익을 올리자는 속셈이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안노 히데아키는 새로운 극장판이 리메이크가 아니라 리빌드라고 밝혔다. 단지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설정을 가지고 다르게 진행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제작 동기에는 이후 12년간 ‘에바보다 새로운 애니메이션은 없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또한 한때 오타쿠 4천왕의 하나로 불린 안노 히데아키는 을 만든 뒤, 오타쿠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애니메이션, 만화 팬과 업계의 지나친 폐쇄성에 염증을 느끼’고 ‘현실에 대처해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현실 인식의 변화 역시 의 리빌드에 뛰어들게 된 이유였다. 은 분명히 탁월하고 완결적인 구조를 갖춘 애니메이션이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게 진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편의 감독에 이어, 새로운 제작사인 카라를 설립해 총감독을 맡은 안노 히데아키는 네 편의 극장판을 통해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에반게리온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다. 그 첫 번째 편이 바로 다.

리빌드라는 선언처럼, 의 전반부는 TV 시리즈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하지만 TV 시리즈를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세하게 대사가 달라지고, 이후에 나올 장면들이 앞당겨 나오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전체적인 설정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될 수 있음을 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기술적 진보에 따른, 더욱 화려한 장면들도 만날 수 있다. 클라이맥스에 펼쳐지는 ‘야시마 작전’은 근접 전투가 불가능한 사도를 에바가 원거리 저격을 하는 장면이다. 일본 전역의 전력을 끌어오고, 사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다양한 폭격이 펼쳐지면서 양자포를 준비하는 과정은 밀리터리 마니아들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넘친다. 이 장면을 연출한 것은 극영화 와 의 감독인 히구치 신지다.

예고편에 뛰는 심장

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하게 파편화돼 자신만의 세계에서 몸부림치던 그들은, 이제 서로를 신뢰하며 어디론가 나아가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막연한 고독을 참으며 타인과의 접촉이 두려워도 함께하길 원하는 각오의 이야기’라는 제작진의 말처럼,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는 동료를 보고 용기를 얻는 신지가 된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는 분명히 리빌드를 감행한, 새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는 다음 극장판인 의 예고편이 나온다. 달에서 오는 에반게리온 6호, 그 단서만으로도 심장이 뛴다. 안노 히데아키는 21세기에도 쉬지 않고 걸작을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의 위대한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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