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전시에 이용당하는 공공 미술관’ 비난에도 서양 보석회사와 손 잡은 국립 덕수궁 미술관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천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20세기 초 인도 마하라자(왕)의 목걸이, 사랑을 위해 영국 왕위를 버린 윈저공이 아내 심프슨 부인에게 선물한 색보석 목걸이,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기념으로 비행사들에게 선물한 금우주선 모형, 각종 보석 브로치와 찬란한 왕관 장식…. 말만으로도 눈앞이 번쩍거리는 듯한 이 명품들은 ‘왕의 보석상’이란 찬사 속에 세계 주요 왕가의 보석, 귀금속 수요를 독점해온 세계 굴지의 보석회사 카르티에의 제품이다.
관내 학예사들 반대하고 나섰으나 강행
석 달여 뒤 이 카르티에 보석들은 서울 도심의 국립 덕수궁 미술관(관장 최은주) 전관을 통째로 수놓게 된다. 상부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관장 김윤수)이 카르티에 본사와 공동 기획으로 소장 보석 명품들을 선보이는 ‘카르티에의 예술’전을 4월22일~7월13일에 열기로 확정했기 때문이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대표 미술관의 노른자위 전시장이 서양 보석회사의 판매 컬렉션을 과시하는 장소로 뒤바뀌는 셈이다. 그동안 국내 미술판의 유행 트렌드에는 별반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당연히 달갑지 않은 문화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번 전시는 2007년 초부터 추진 과정에서 관내 학예사들의 반대 의견을 물리치며 강행해온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덕수궁 미술관의 1, 2층을 채울 이 전시는 1860년부터 1960년까지 카르티에 명품 컬렉션들로 이뤄진다고 한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카르티에 본사의 명품 컬렉션 보석들이 대거 들어온다. 백금을 이용한 작품 외에 이집트, 근동, 중국, 일본의 영향을 받은 다기한 보석 디자인 작품들을 전시한다. 디자인 드로잉, 유리원판 사진, 20세기 초 보석 세공에 쓰던 공구, 작업용 책상까지 출품작 수만 250점이 넘어 역대 카르티에의 순회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국내 보석 전시로도 최대 규모다. 전시 이외에 강연회, 공방 장인을 초빙한 마스터클래스(시연행사)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카르티에 쪽은 아직 공개하지 않았지만, 보험가액만도 수천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미술관 쪽은 “카르티에 재단 컬렉션을 통해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공예의 특성을 살펴보는 전시”라고 취지를 설명했지만, 전시는 어떤 수식을 붙이든, 국제적 권위를 겨냥한 다국적 보석상의 고차원 홍보 판촉 무대라는 본질을 비켜가지 못한다. 2006년 기업식으로 자체 수익사업 성과를 평가받는 책임운영 기관이 된 이래 국립현대미술관도 결국 이윤 중심의 상업전시 물결에 동참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실제로 카르티에 쪽은 이미 5년여 전부터 덕수궁 미술관을 한국 순회전 장소로 점찍고 집요하게 기획전시 요청을 해왔다고 미술관 쪽은 밝혔다. 그동안 일관되게 거부 방침을 지켜왔으나, 2007년 초 미술관 쪽은 공동 기획 형식으로 카르티에의 전시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의아한 것은 전시의 환경, 작품 운반 조건 등을 상의하고 전시의 얼개를 잡는 약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덕수궁 미술관 학예사들이 모두 빠졌다는 점이다. 2007년 11월 말 체결된 전시 약정은 관장 직속인 홍보마케팅팀이 꾸린 전시 프로젝트팀이 카르티에 쪽과 직접 맺은 것으로 확인됐다. 미술관 쪽 내부의 말들을 들어보면, 2007년 초 중장기 전시 기획회의 때 관내 학예사들은 “특정 업체의 상업적 의도에 이용될 수 있다”며 대다수가 반대 의견을 밝혔고, 일부 학예사들은 직접 관장에게 “뒤탈이 우려되니 하면 안 된다”고 진언했으나 이후 별 공론화 과정 없이 전시가 추진됐다고 한다. 최은주 관장은 “약정 과정은 손을 떼고 관련 서류만 이첩받아 전시 기획을 추진하라는 지시에 따라 우리는 전시 기획만을 담당했다”며 “상업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출품작들을 유럽의 공예사적인 맥락에서 접근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전시 약정을 추진한 최윤정 홍보마케팅팀장은 “공예사적인 맥락에서 새롭게 소개할 만한 전시라는 판단으로 추진했으며 학예실 쪽도 추진 과정에 관여했다”고 말했다.
미·일·중 전시관들도 품격 논란 휩싸여
카르티에는 90년대 이래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비롯해 일본 도쿄의 국립박물관, 중국 상하이 미술관 등 아시아 구미 각지의 최고 미술관 14곳에서 컬렉션전을 진행했다. 그 결과 카르티에는 회사의 권위에 더욱 명망을 쌓았을지 모르지만, 전시를 해준 기관들은 예외 없이 품격 논란에 휩싸였다. 도쿄 국립박물관의 경우 2005년 카르티에 보석전을 주최하면서 박물관의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렸다는 지탄에 시달렸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도 이탈리아 패션 거장 아르마니의 옷 회고전을 하면서 크렌스 관장이 아르마니 쪽에서 20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금 용도로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구설에 오른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나마 카르티에 순회전이 열렸던 외국 유명 전시장들은 상설전 공간이 확보된 대형 공간이어서 카르티에 전시는 전체 전시장의 일부분 소품전으로 진행됐다. 반면 덕수궁 미술관 전시는 상설관이 없어 전관을 통째로 내줘야만 한다. 보석 전시가 그 자체로 덕수궁 미술관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분명히 욕먹을 것’이란 미술관 사람들의 걱정대로 미술동네에서는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시의 당위성과 부작용에 대한 의문과 우려, 실망의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왜 이 시점에 도심 덕수궁 미술관에서 꼭 이 전시를 유치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최근 미술시장의 활황으로 패션과 미술, 상품과 미술의 결합은 부지기수로 진행 중이다. 그러나 카르티에가 사실상 기획의 실권을 쥐고 있는 이 전시는 국립 기관에서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유럽 보석공예사에 대한 연구성과가 집적된 것도 아니며 전담 학예사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관 안팎에서는 이번 전시 개최를 대가로 카르티에가 미술관의 대형 기획전에 앞으로 거액을 지원하는 스폰서를 맡겠다고 밀약했다는 등의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다. 약정을 주도했던 최은정 홍보마케팅팀장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약정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고 말을 끊었다.
“정부보조금 받으면서 이런 전시까지…”
평론가 하계훈씨는 “공공 미술관이 돈 힘을 내세운 기업들의 상업전시에 이용당하는 외국의 좋지 않은 전례를 따라가는 것”이라며 “국립현대미술관은 운영비 상당 부분을 정부에서 보조받는 행정형 책임운영 기관이라 재정 압박도 덜한데, 내부 큐레이터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전시를 강행한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하씨는 “자칫 기획력 부재는 물론, 뒷거래 의혹을 부를 수 있다”고 덧붙였다. 2006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이었던 기획자 박만우씨도 “공공 미술관이 외부의 상업전시를 너무 많이 유치해 비판이 적지 않은데, 순수하지 않은 보석 순회전까지 끌어와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우리 근대미술의 보금자리인 덕수궁 미술관의 정체성만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립 미술관의 보석 명품전 유치가 따를 수밖에 없는 대세인지, 기관의 공공성을 후퇴시키는 악수인지, 미술계는 새봄 고민스러운 화두를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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