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김주하·노현정 시대’, 오락 프로그램 속 여성 아나운서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
현재 한국에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를 하기 가장 쉬운 직업군 중 하나는 공중파 3사의 여자 아나운서다. 여자 아나운서들은 최송현 한국방송 아나운서처럼 에서 원더걸스의 춤을 춰도, 문지애 문화방송 아나운서처럼 오락 프로그램에서 남자 연예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돼도 검색어 1위를 한다. 공중파 방송사가 끊임없이 여성 아나운서를 오락 프로그램에 투입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출연료가 싸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관심의 대상이 되는 현재 한국 여성 아나운서의 독특한 위치 때문이다. 어지간한 여성 연예인의 화보는 기삿거리도 되지 않지만, 문화방송 에 출연하는 서현진, 손정은, 문지애, 최현정 등 문화방송 여성 아나운서들이 프로그램 홍보를 위해 간단하게 찍은 화보는 금세 화제가 된다. ‘예쁘고 지적이고 반듯한’ 여성 아나운서의 직업적 이미지는 연예인들이 갖기 어려운 자산이다.
강수정이 춤출 때만 해도 논란 일었는데…
여성 아나운서들을 끌어들인 오락 프로그램은 그 사실을 강조한다. 는 여성 아나운서 네 명을 공동 진행자로 내세웠고, SBS 의 ‘기적의 승부사’는 연예인 팀과 아나운서 팀의 게임이 콘셉트다. 한국방송 의 ‘하이파이브’에서 새로운 멤버로 합류한 이정민 아나운서는 첫 출연 내용을 아침 정보 프로그램 진행 모습과 아나운서실 소개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연예인’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 관심을 얻는다. 는 아나운서들이 토크, 연기, 노래, 게임 등 뉴스 진행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하고 이정민 아나운서는 다른 멤버들과 똑같이 다양한 미션에 도전하며 춤, 코미디, 운동 시합까지 소화한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락 프로그램과 여성 아나운서에게 심각한 딜레마가 된다.
대중이 오락 프로그램 속 여성 아나운서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가장 정확하게 짚은 것은 노현정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당시의 였다. 는 무표정하고 규칙에 엄격한 여성 아나운서와 천방지축 남자 패널들을 통해 미묘한 긴장관계를 일으켰다. 차분한 여성 ‘아나운서’ 노현정은 남자 ‘연예인’ 패널들의 해프닝을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 노현정 아나운서가 웃거나 혹은 무언가 실수를 하면 곧바로 화제가 됐고, 노현정 아나운서의 마지막 방송은 그가 ‘처음’으로 ‘나나나 솨~’에 맞춰 춤을 추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여성 아나운서의 기존 이미지가 오락 프로그램에서 요구하는 것들과 충돌할 때 생기는 미묘한 긴장이 여성 아나운서가 ‘오락적’인 무슨 행동을 하든 관심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여성 아나운서들이 거의 모든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지금, 여성 아나운서들은 노현정 전 아나운서처럼 아나운서라는 이유만으로 그때만큼의 반응을 얻기 힘들다.
‘여걸 식스’ 시절 강수정은 춤을 춘다는 사실만으로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까지 겪는 화제의 주인공이 됐지만, ‘하이파이브’의 이정민에게 그런 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럴수록 여성 아나운서들은 줄어드는 자신의 이미지 자산을 메우기 위해 갈수록 연예인과 똑같은 일들을 한다. 문화방송 ‘불가능은 없다’의 서현진 아나운서는 정글 한가운데 들어갔고, ‘기적의 승부사’ 아나운서 팀의 김주희는 너무 힘이 세서 연예인들에게 놀림받는 ‘힘주희’ 캐릭터가 됐다. 하지만 김주희 아나운서가 함께 출연하는 신정환처럼 웃기기란 어렵고, 이정민 아나운서는 연예계에서도 기 세고 끼 많기로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 사이에서 예쁜 ‘막내’밖에 할 수 없다.
더 나간 , 한발 뺀
설사 그들이 천부적인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여성 아나운서의 직업을 갖고 있는 이상 연예인처럼 언어 파괴를 하거나, 혹은 ‘돌아이’나 ‘바보’ 같은 캐릭터는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지적이면서도 어수룩해야 하고, 단정하면서도 끼가 있어야 하며, 말장난을 하지 않으면서도 언변이 좋아야 한다. 방송사는 여성 아나운서들이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길 원하지만, 실상 그들은 어느 쪽에서도 자리를 잡기 힘든 트위너(농구에서 확실한 포지션 없이 여러 포지션을 뛰는 선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방송사가 여성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재인식해야 할 때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김주하의 시대도, 노현정의 시대도 지난 지금 여성 아나운서는 더 이상 출연만으로 프로그램의 주목도를 높일 수도 없고, 연예인처럼 재미를 책임질 수도 없다. 그래서 최근 의 변화와 문화방송 의 등장은 흥미롭다. 는 최근 연예인 MC 세 명과 아나운서 네 명 외에 여성 연예인 네 명을 추가했다. 연예인은 거친 말을 쓰고, 아나운서는 바른말을 쓴다는 콘셉트를 내세우는 식이다. 이 때문에 출연진들은 너무 많아졌고, 프로그램은 산만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 아나운서의 정체성은 더 확실해졌고, 여성 연예인과 맞서는 사이 여성 아나운서의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여성 아나운서들의 의외의 캐릭터가 드러난다. 손정은 아나운서는 연예인 출연자에게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자신이 그저 착하고 순한 여성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반면 2부 격으로 진행되는 ‘죽기살기 수다방’에서는 아나운서라는 사실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연예인들과 섞여 게임을 한다. 기존의 여성 아나운서 이미지를 한 번 더 뒤집거나, 여성 아나운서를 아예 연예인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것이다.
반면 은 문지애 아나운서를 철저하게 진행자의 위치에 놓는다. 문지애 아나운서는 프로그램 초반에 퀴즈를 내는 역할만 하고, 실질적인 웃음은 연예인 출연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과거 의 ‘바른말 쓰기’와 여성 아나운서의 이미지가 부합했듯, 의 콘셉트인 예의 배우기에 여성 아나운서의 이미지는 잘 어울린다. 가 이미 오락 프로그램에서 ‘인플레’가 일어난 여성 아나운서를 어떤 식으로든 엔터테이너로 만들려고 한다면, 은 거기서 한발 빠져나와 여성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에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는 정도만 보여준다.
시청률 책임질 특별한 존재 아니니
어느 쪽이 좋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성 아나운서가 더 이상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시청률을 책임질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방송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만능 엔터테이너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로 상담’을 하고, 정말로 ‘연예인’을 할 아나운서들에게 그만큼 필요한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여성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오락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연예계 기획사들도 가수에게 연기를 시키려면 최소한 연기 레슨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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