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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전곡을 연주하리라

등록 2007-11-16 00:00 수정 2020-05-03 04:25

피아노소나타 릴레이 연주에 도전한 백건우와 CD 발매한 첼리스트 양성원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어떤 이들이 성경을 매일 읽듯이 나는 인간의 모든 고뇌를 극복한 베토벤을 공부한다. 고뇌를 극복하려는 고투를 시공을 초월해 기록한 것이 바로 그의 음악이다.”

뉴욕필 악단을 이끌었던 독일인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는 2001년 내한연주 때 이런 ‘신앙고백’을 털어놓았다. 사실 대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음악인들에게 분석이 아닌 신앙적 숭배의 대상이다. 그는 작곡가이기에 앞서, 본질적으로 인간 탐구의 극한을 추구했던 ‘초인’이기 때문이다.

32곡에 모인 50여 년의 인생 역정

그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귀가 멀고, 평생 병고와 가난을 달고 살았다. 자기 곡의 연주를 들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살 충동이 항상 내면에 꿈틀거렸다. 그러나 거장에게는 고뇌로 부글거리는 자신의 내면 곳곳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성찰에서 비롯된 악상들을 죽을 때까지 악보에 음표로 기록했다. 삶을 걸고 음악과 대결한 직업 정신, ‘훌륭한 사람은 고뇌를 통해 환희를 얻는다’는 신념은 베토벤의 고투를 영원의 권좌에 밀어올린 원동력이 되었다.

베토벤이 평생 작곡을 거듭한 피아노소나타 32곡은 50여 년에 걸친 베토벤의 인생 역정을 응집한 음악적 자서전이다. 고전적 격식에 충실한 청년기와 질풍 같은 자유정신이 감도는 낭만기를 거쳐 말년에 소나타 형식 자체도 버리고, 선적인 적멸의 세계까지 이른 여정을 다 보여준다. 절집에 비유한다면, 그의 피아노소나타는 피아노 음악사에서 단연 대웅보전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곡 자체가 곧 거장의 발자취이기에, 헤아릴 수 없는 후대 연주자들이 200여 년 동안 이들 소나타를 연주하고 녹음했다. 광고음악에도 등장하는 등 이른바 3대 소나타, 싱그러운 서정의 등이 유명한 곡들이다.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꼽는 최고의 걸작은 말미의 후기 소나타 27, 28, 29, 30, 31, 32번이다. 최고의 백미는 ‘하머클라비어’로 불리는 29번과 32번이다. 29번은 인간의 온갖 감정, 광기가 투사된 우주적 세계를 괴물처럼 건반으로 주파한다. 32번은 4악장의 소나타 방식을 벗어나 격렬·처절한 1악장과 불씨가 꺼지듯 침잠하는 2악장으로만 짰다. 잦아드는 피아노의 타건 속에 존재감까지 사그라지고 마는 2악장 아리에타는 피아노 음악에서 가장 높은 득도의 경지를 실현하고 있다. 그래서 바크하우스와 폴리니, 켐프 등의 거장은 이 후기 소나타에 최고의 내공을 바쳤다.

“온전히 베토벤에 빠져서 연주하고파”

이 우뚝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32곡을 유럽에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국내에서 한달음에 연주하기로 했다. 베토벤이 평생 작곡한 전곡을 7일 동안 여덟 차례 연속 연주회를 통해 들려준다. 이 대작 릴레이 연주는 12월8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1577-5266)에서 진행된다. 매일 저녁 7·8시 공연이지만, 둘쨋날인 9일 연주는 낮, 저녁 두 차례 공연한다. 피아노 연주사에서 7일 동안 연속 릴레이 연주로 전곡을 소화한 시도는 사실상 전례가 없었다고 기획사 쪽은 전한다. 기교도 기교지만, 베토벤의 인생 역정에 대한 오랜 탐구와 ‘강철 체력’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생각도 하기 어려운 이벤트다. 학구적인 작품 연구와 연주로 ‘구도자’란 별명이 붙은 백씨는 “쉬지 않고 온전히 베토벤에 빠져서 연주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90년대 중반부터 “터놓고 베토벤을 만날 때가 됐다”고 공언해온 그는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국내외 연주 일정의 상당 시간을 베토벤의 소나타로 채우면서 수련을 계속해왔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곳곳에 있는 베토벤의 유적, 관련 저술들을 대부분 섭렵했다고 한다.

이번 연주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이 레퍼토리의 순서다. 12월12일까지 1~26번의 초·중기 소나타들을 골고루 연주한다. 그런데 13일부터 시작할 후기 소나타, 곧 27~32번까지는 순서대로 연주한다. 그만큼 후반부 연주에 더욱 전념하겠다는 뜻이다. 음악의 형식이나 시류 따위를 초월한 후기 소나타가 연주하기 험난한 고봉의 경지이며, 백씨가 이 부분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1999년 12월 그가 국내에 첫선을 보였던 베토벤 후기 소나타 30~32번 연주는 아쉬움을 남겼던 무대로 기억된다. 체력적으로 지친 모습이 역력했고, 해석 측면에서도 악장 사이의 완급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그의 삶을 걸고 마련한 필생의 전곡 연주에서 그가 후기 소나타들을 어떻게 조리해낼까. 미세한 선율 세부를 살릴지, 악장 전체의 흐름을 더 중시할 것인지 관심거리다. 여덟 차례의 연주를 다 관람할 수 있는 할인 예약티켓인 ‘베토벤 클럽’(600석)은 올 초 매진된 상태다. 앞서 백씨는 전속 음반사인 데카에서 최근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집 녹음을 마치고, 이달 안에 출시할 예정이다.

첼로소나타 전곡에 변주곡 세 곡 더해

베토벤의 험산을 다른 길로 등정해온 연주자가 한 명 더 있다. 2005년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음반을 냈던 연세대 교수 양성원씨다. 그는 최근 전속 음반사인 이엠아이 클래식에서 베토벤 첼로소나타 전곡 음반을 냈다. 전곡집은 하늘로 뻗쳐오르는 사진가 배병우씨의 소나무 사진을 표지로 삼고 두 장의 CD에 베토벤의 첼로소나타 1~5번 전곡과, 그가 헨델과 모차르트 오페라의 원곡을 주제로 작곡한 변주곡 세 곡을 특별한 선물처럼 덧붙였다. 베토벤의 첼로소나타는 피아노소나타에 비해 곡 수는 적지만, 그의 창작 초기·중기·후기의 작업 세계를 아우르기는 마찬가지다.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다양한 기교와 영적인 감성이 반영돼 첼로의 ‘신약성서’로 꼽히고 있다. 마지막 4, 5번은 베토벤의 후기 작품 시대의 서막을 여는 곡으로 더욱 깊어진 베토벤의 정신세계를 느끼게 한다.

영국 런던의 헨리우드홀에서 녹음한 음반 곡들은 감정선의 표현에 충실하다. 요철이 뚜렷한 입방체처럼 선율의 빠르기, 음색의 대조가 한결같이 명확하고 각이 져 있다. 격정과 침잠이 대비되면서 베토벤 특유의 강인한 인상이 도드라지게 전달된다. 파스칼 뒤봐이용의 피아노 연주는 양씨의 선율에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연하게 하모니를 맞추어주고 있다. 모노톤의 흑백사진처럼 음색의 명암이 명확한 것이 장점. 격하게 선율을 조이고 푸는 감각, 고즈넉한 추스림 따위가 적절히 안배됐다.

국내 두 대가의 연주는 신앙에 가까운 경외감과 열정으로 거장 베토벤의 인간적 고뇌와 내면, 인생사를 좇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삶의 질곡에 투쟁하면서 인간의 품격을 고양하려 애썼던 거장의 파토스(내면의 충동)를 더듬어가는 여정이다. 20년 전부터 매해 거르지 않고 베토벤 첼로곡을 켜왔다는 양성원씨는 “베토벤의 힘은 감각적 자극이 아니다. 영혼을 쓰다듬고 역사를 초월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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