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로영화의 발견, ‘여성 전용 영화제’ 표방하는 핑크영화제
▣ 김봉석 영화평론가
11월1일부터 서울의 씨너스 이수극장에서 핑크영화제가 시작한다. 일본의 핑크영화? 한국식으로 말한다면, 에로영화란 뜻이다. 일본의 에로영화인 핑크영화가 뭐 그리 대단하기에 영화제까지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당연하다. 대체로 에로영화는 남성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눈요기용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에로영화, 핑크영화는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핑크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 두어 편을 보고 나면 조금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핑크영화가 단지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상쾌하거나 즐거울 수도 있다니. 그리고 여성이 즐기기에도 전혀 부끄럽거나 폭력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니.
방 하나 잡고 찍다 ‘로망 포르노’로
놀랍게도 이번 핑크영화제는 여성 전용 영화제를 표방하고 있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여성들만의 축제다. 다지리 유지의 , 메이케 미쓰루의 등의 상영작은 분명 핑크영화에 속하지만, 사랑과 섹스의 파란만장 속에서 흔들리고 고뇌하는 여성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린 여성영화에 가깝다. 성애 장면이 다소 노골적이라는 것 말고는, 여느 멜로영화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아니 사랑의 조건 중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인 섹스에 대해서 더욱 직접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이고 공감이 가기도 한다. 핑크영화가 단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섹스를 중심으로 인간의 풍경을 그리는 영화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 영화제에 상영되는 핑크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핑크영화가 존재하지만, 그 반대편에 선 핑크영화들도 굳건하게 성장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핑크영화는 어떤 길을 걸어왔기에, 여성들을 위한 핑크영화까지도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일본의 핑크영화는 무명의 여배우를 기용해 방 하나에서 촬영하는 등 열악한 조건에서 시작했지만, 소극장에서 인기를 끌면서 한때 일본의 전체 제작 편수에서 40%가 넘는 등 독립 프로덕션의 활발한 수입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일본 영화산업이 몰락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1971년 메이저 영화사인 니카쓰가 도산하자, 남은 사람들은 노조를 중심으로 수익성이 좋은 핑크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싸구려 핑크영화와 차별화하기 위해 ‘로망 포르노’란 브랜드를 만든 니카쓰는 우수한 스태프와 기자재를 이용하는 동시에 기존 핑크영화의 2~3배의 제작비를 투입해 고급스러운 ‘핑크영화’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니카쓰는 1주에 1편꼴의 대량생산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신진 감독의 등용문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70년대 로망 포르노를 대표하는 감독으론 구마시로 다쓰미와 다나카 노보루가 있다. 구마시로 다쓰미의 대표작 은 스트립 걸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성들의 시선에서 스트립 걸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거친 남성적 세계와 싸워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들어 있다. 후기작인 에서는 유곽에서 몸을 파는 게이샤의 생활을 건강하고 희극적인 태도로 묘사한다. 그것은 에도시대 풍속화의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의 다나카 노보루는 구마시로 다쓰미와 달리 바로크적인 에로티시즘을 그려냈다. 60년대에도 의 다케치 데스지, 의 와카마쓰 고지, 의 야마모토 신야 등 핑크영화의 작가들은 존재했지만 특히 로망 포르노의 등장 이후 핑크영화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가진 신진 감독의 필수적인 코스가 되었다. 의 수오 마사유키, 의 모리타 요시미쓰, 의 구로사와 기요시, 의 나카하라 ?? 등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막론하고 지금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중견 감독들 다수가 핑크영화의 이력을 지니고 있다.
AV 범람하자 오히려 색깔 확고해져
비디오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80년대에는 핑크영화 대신 AV(Adult Video)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야기가 지배하는 핑크영화 대신, 여성의 몸과 이미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AV가 남성들의 시선을 뺏은 것이다. 하지만 AV의 범람은 오히려 핑크영화의 다양한 발전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차피 보여주는 것으로는 AV를 당할 수 없다. 핑크영화는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육체와 섹스를 보여주고 관객을 어떤 세계로 끌어들여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성과 마찬가지로 ‘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욕망하는 여성을 위한 핑크영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주목받는 감독들도 끊임없이 등장했다. 80년대에 데뷔한 사토 히사야스, 사토 도시키, 제제 다카히사, 사노 가즈히로 등이 핑크영화의 ‘4천왕’으로 불리며 평가를 받은 것에 이어 90년대에 데뷔한 이마오카 신지, 메이케 미쓰루, 다지리 유지, 사카모토 레이, 에노모토 도시로, 우에노 신야, 가마타 요시타카는 핑크 ‘칠복신’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오히려 AV의 범람을 통해서, 핑크영화는 자신의 색깔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성이란, 인간의 중요한 얼굴의 하나다. 성을 외면하고는, 가리기만 해서는 우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핑크영화는 솔직하고 대담하게 우리의 맨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장르다. 일본에서 유독 핑크영화가 발전한 것은, 독특한 영화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을 죄악시하지 않는 문화적 토양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핑크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지금 일본 핑크영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특히 근엄한 한국인에게 의미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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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핑크영화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후지이 겐지로 감독의 다큐멘터리 은 필수다. 구로사와 기요시, 와카마쓰 고지, 이즈쓰 가즈유키 등 거장들의 인터뷰를 통해 핑크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고, 지금 활발하게 핑크영화를 찍고 있는 메이케 미쓰루 등의 촬영 현장을 보여주며 핑크영화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내다본다. 핑크영화란 대체 무엇인지, 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봐야 할 작품이다.
수오 마사유키의 와 다카하시 반메이의 는 핑크영화의 궤적, 과거를 알기 위해서 봐야 한다. 존경하는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를 핑크영화에 변주한 와, 폭력과 섹스의 핑크영화가 어떻게 사회성을 담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는 핑크영화의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다지리 유지의 , 메이케 미쓰루의 , 이마오카 신지의 과 등의 작품은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다. 성을 다루면서, 여성이 중심에 서서 모든 이야기를 끌어가고 감정까지 주도하는 핑크영화는 조금 야한 멜로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복잡하면서도 약간씩 뒤틀린 내면과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감독의 연출력은 핑크영화의 내공이 꽤나 두터움을 보여준다. 사실 핑크 칠복신 감독의 작품은 어느 것을 보아도 좋다. 어느 영화를 보더라도, 일본의 핑크영화가 우리가 알던 그저 야하고 폭력적인 에로영화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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