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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는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

등록 2007-10-19 00:00 수정 2020-05-03 04:25

새 음반 내고 전국 순회 공연 시작한 비올라 연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

▣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비올라 악기의 음색은 여성의 저음에 견줄 수 있어요.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 같은 거죠.”

그는 성대 대신 활과 현으로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국내 클래식 동네에서 가장 눈길을 많이 받는 명사가 된 재미 비올라 연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29). 새 음반에서 슈베르트의 저 유명한 연가곡 를 차분히 비올라로 노래한다. 바이올린보다 크고 첼로보다 작은 비올라가 군더더기를 덜어낸 기타 반주와 어우러져 만드는 선율들은 함함하다. 입양아로 정신지체자가 된 그의 어머니와 비탄을 품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연가라서 더욱 그렇다. 비올라 현의 수더분한 선율과 음색은 바이올린처럼 신경질적이지 않고, 첼로처럼 깊이 가라앉지 않으면서 귓속으로 들어온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떠나는 젊은 나그네의 속내는, 특별히 감정을 비약하지도 강조하지도 않으면서 격동적인 활질로 빚는 비올라의 중성적인 음색에서 색다르게 드러난다.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에 바리톤 가수 피셔디스카우의 체념 어린 음성을 기억하는 애호가들에게 용재 오닐의 는 낯설고도 친근한 선율이다. 비올라는 가수, 반주 피아노의 타건은 은은한 기타의 퉁김이 대신한다.

강원도 교회에서 녹음, 한국만 판매

권위 있는 노란 딱지 상표로 유명한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이하 디지)에서 오닐이 최근 첫 전속 음반을 냈다. 개인 음반으로는 세 번째. ‘슈베르트-겨울여행’이란 제목이 붙었다. 아티스트를 고를 때 까다로운 기준으로 유명한 디지가 그를 특별히 골랐고, 녹음도 강원도 원주의 작은 교회에 세계 최고 권위의 에밀 베를리너 녹음 스튜디오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 이뤄졌다. 디지 전속으로 음반을 녹음한 경우는 현 서울시향 감독인 마에스트로 정명훈씨와 그의 남매인 정트리오 정도인데, 국내에서 음반을 녹음한 것은 처음이다. 어릴 적 조부모 집 거실에서 노란 딱지의 디지 음반을 본 기억을 아로새겼다는 그에게는 더욱 각별한 녹음이기도 하다.

음반은 감미롭고 음울한 슈베르트 곡들로 채웠다. 19세기 초 만든 기타+첼로 얼개의 옛 악기 아르페지오네 전용으로 작곡한 가 트랙 첫 번째, 의 24곡은 이성우, 올리버 파르타시 나이니 듀오와 박종호씨의 기타 반주로 연주했다. 음반을 처음 공개한 기자간담회에서 용재 오닐은 직접 기타 반주자들과 함께 CD 음반의 곡들 일부를 실황처럼 진지하게 협연했다.

새 음반은 사람 목소리와 가까운 비올라의 음색을 십분 살리려 한 의도가 보인다. 소품곡 모음인 2집 에서 ‘엄마가 섬그늘에…’로 시작하는 동요 를 웅숭깊은 비올라 선율로 편곡해 인상을 남겼던 오닐의 비올라는 인간적 서정과 정취를 더욱 집요하게 뽑아내려고 애쓴다. 첫 곡 부터 등을 거쳐 마지막 곡 에 이르기까지 그의 현은 종종 관악기처럼 울리면서 고독한 여정을 끌어간다. 애수와 서정을 흩뿌리지만, 가락의 맥을 명확히 잡아주는 피아노의 타건이 없어 버석버석하거나, 가냘픈 줄기 같은 느낌도 든다. 비올라와 기타는 낯선 조합이나, 극적인 반전이나 기복이 없는 이 연가곡의 우울한 정조를 감안하면 교묘하게 잘 조합된 구성이다. 첫 곡의 그 애절하고 슬픈 노래, 적절한 선을 유지하면서 반주의 선을 유지하는 기타 연주는 피셔디스카우의 연주를 받쳐주는 제럴드 무어의 푸근한 반주와도 비슷해 보인다. 클래식 연주자의 강렬한 자기확인과 대중성의 면모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린 그의 새 음반은 명품 음반사 디지의 절묘한 기획력을 느끼게도 한다. 일단 판매를 한국에 한정한 것도 그렇다. 크로스오버 혹은 퓨전 음악에 민감한 국내 청중들이 어떻게 화답할지가 관심사다.

‘입양아 2세’ 아닌 ‘정통 클래식’에 주목

2004년 한국방송의 TV 다큐멘터리 에 인생 역정이 소개된 바 있는 용재 오닐은 알려진 대로 입양아 2세다. 입양된 어머니가 열병으로 정신지체가 된 뒤 입양한 현지 조부모의 지극한 보살핌 아래 가난의 역경을 뚫고 자랐다. 줄리아드 대학원에 비올라 전공자로는 처음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졸업 뒤 미국 각지의 숱한 앙상블과 교향악단 협연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2005, 2006년 두 장의 음반이 국내에서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고, 지난해에는 미국의 권위 있는 클래식 상인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을 받았다. 길 샤함, 정경화 등의 세계적 대가들과 협연한 그는 다국적 영재 악단인 세종솔로이스츠 단원이며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달 초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영화 의 사운드트랙 메인 테마를 작곡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입양아 2세라는 성장 환경과 정상급 연주자가 되기까지 역경을 극복한 과정에 감동해서 그를 주목해왔다. 하지만 그의 존재 덕분에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 끼여 개성과 존재감마저 미약했던 비올라의 의미를 청중들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준 공로도 지나칠 수 없다. 이제 그는 대중적인 지명도 외에도 비올라 연주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한 정통 음악 연주자로서 작품성 자체에 대한 탐구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의지를 또렷이 드러냈다.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새 음반은 분명한 정통 클래식이며, 크로스오버가 결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그는 11월2일 저녁 7시30분 KBS홀에서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씨가 기획한 ‘아르스 노바’ 무대에 출연해 현대 작곡가 브렛 딘과 크리스 폴 하먼의 곡들을 아시아 초연할 예정이기도 하다.

한편 용재 오닐은 10월13일부터 새 음반 발매를 맞아 수록곡을 들려주는 전국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11월2일까지 과천, 거제, 인천, 대전 등을 누빈다. 서울에선 10월26, 27일 LG아트센터에서 콘서트를 한다. 를 이 땅 곳곳에서 비올라로 들려줄 ‘가을 나그네’. 용재 오닐은 지금 어디서든 찾는 이들이 기다리는 전성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 02-318-4304, 210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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