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양지 스님의 대표작 녹유전에서 발굴된 3개의 얼굴 도상, 사천왕의 진실은?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양에 조각 거장 미켈란젤로가 있다면 우리에겐 신라의 양지 스님이 있다!’
이 땅의 미술사학도들에게 7세기 신라의 조각승 양지는 자부심의 원천이다. 힘과 기백이 넘치는 탁월한 사실주의 조각의 대가,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비롯한 숱한 불상 조각과 부조상들을 빚어내며 민중들의 찬양 공덕을 받은 거장이 바로 그다. 등에 고대 조각가로는 유일하게 이름이 전해져오는 양지의 대표작 또한 현재 일부가 남아있으니, 일제시대 경주의 7세기 신라 고찰 사천왕사터에서 나온, 녹색 유약 얹은 불교의 수호신상 부조 장식(이하 녹유전돌)이 그것이다. 흔히 사천왕상을 새긴 것이라고 하여 ‘녹유사천왕상전’으로 불러온 이 녹유전은 통일전쟁 때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한 기도비법을 펼쳤던 이 절터의 내력과 어우러져 한국 고대 조각사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손꼽혀 왔다. 갑옷 차림에 악귀를 짓밟고서 화살, 칼 들고 불국토를 지키는 호위 신상들의 강인한 자태, 실룩거리는 근육 등의 생생한 사실주의적 묘사는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섬세한 그림을 보는 듯한 감흥을 안겨준다.
파편이 3개라면 어떻게 사천왕이?
정교한 틀로 찍어낸 이 아름다운 녹유전이 최근 국내 미술사학계와 고고학계를 새삼 술렁거리게 하고 있다. 지난해 봄부터 본격화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사천왕사터 재발굴 과정에서 이 녹유전에 대한 통설과 다른 새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녹유전은 불국토를 사방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네 호위신인 사천왕의 용모를 새긴 것이라는 통설이 유력했었다. 1910~20년대 절터에서 일본인들이 발굴했던 녹유전 조각들을 80년대 추스려 모아 네 유형의 사천왕상으로 복원해낸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의 학설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절터 경내의 서쪽 목탑터 발굴 결과는 이런 추론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으로 나타나 녹유전 실체를 둘러싸고 첨예한 논란이 벌어질 조짐이 보인다.
논란의 핵심은 그동안 알려졌던 녹유전의 부조 신상의 정체가 과연 세상의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사천왕 신상이 맞는가로 집약된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물관과 문화재청의 공동 특별전 ‘발굴에서 전시까지’(7월1일까지, 02-2077-9456)는 이와 관련해 학계에 미묘한 파장을 던졌다. 전시는 사천왕사터 탑터의 발굴 결과를 소개하면서 새롭게 발견된 녹유전돌 조각들과 더불어 녹유전이 붙어있었던 목탑의 기단부 복원 모형을 선보였는데, 바로 그 모형이 학계의 통설을 뒤엎어버린 것이다. 박물관쪽과 발굴 주체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쪽이 함께 복원한 목탑의 기단부 모형은 한면마다 각각 6개의 녹유전이 붙어있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즉 기단 한 면의 한가운데 계단 양옆으로 각각 세개씩의 녹유전돌이 붙어있는 모양새다. 애초 기단부 한 면당 4개 혹은 2개의 녹유 전돌이 장식판처럼 붙어있는 것으로 보았던 기존 학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서탑터 발굴이 거의 끝난 지금 100여 편에 달하는 녹유전 조각들을 아무리 분석해봐도 신장상의 얼굴과 몸은 세 종류를 벗어날 수 없으며 면석의 길이나 면적 등의 비례를 생각해도 세 개 이상은 나올 수 없다는 추론인 셈이다.
사천왕상은 그 이름대로 당연히 4가지 종류의 도상이 있어야 한다. 서탑 기단부를 샅샅이 뒤진 최근 발굴에서 3가지 유형의 신상 파편밖에 나오지 않았다면, 사천왕상은 성립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물론 일제시대 발굴한 녹유전돌 조각들 가운데 강 교수가 네번째 사천왕상의 것으로 추정 분류한, 녹유전 외곽부의 파편 1개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네번째 상의 존재를 입증하기에는 수량이 너무 빈약하고, 그 파편 자체도 다른 세가지 유형에 속하는 전돌의 일부일 가능성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게 발굴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게다가 일제시대 기록과 이번 발굴결과를 종합해 볼 때 녹유전 조각들이 탑터 사방 기단뿐 아니라 금당터 등 절터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점도 학계 전문가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이주헌 실장은 “출토지점이 한정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뤄 녹유전은 사천왕상의 한정된 의미보다는 절 곳곳을 장식하는 일반적인 장식물의 용도로 쓰였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녹유 전돌에 부조된 신상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 속에서도 강 교수의 사방 사천왕설이 가장 권위있는 견해로 인정받아 왔다. 그는 90년 출간한 논문집 (열화당)에서 녹유전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사천왕상 2구의 전모를 공개하면서 이들 녹유전이 목탑 기단부가 아닌 목탑 1층 내부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반면 문명대 전 동국대 교수는 80년대 논문 등에서 사천왕의 하급 부하신인 팔부신장이 녹유전의 신장상이며 녹유전이 탑터 기단부에 부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견을 제시한 바 있다. 에서 승려 일연이 이 사천왕사탑 아래 팔부신장이 있다고 언급한 구절에 주목해 도출한 주장이지만, 학계는 부조 묘사의 섬세함과 도상의 유사성 측면에서 강 교수의 견해를 따라 사천왕상으로 보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박물관에 전시된 발굴·복원 결과물들은 그런 전제를 사실상 통째로 뒤집는 셈이 된다. 지금도 박물관쪽에서는 이 녹유전을 사천왕상전으로도 부르고 있으나, 최근들어서는 공식 호칭에서 사천왕을 빼자는 의견이 적지않게 나오고 있다.
“녹유전 신상은 사천왕, 믿음 변함 없어”
그렇다고 문명대 교수가 제시했던 팔부신장설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아니다. 팔부신장설의 경우도 한 면에 2개씩 모두 8개의 도상이 나와야 하는데, 발굴 결과는 그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에서 팔부신장상은 대개 9세기 이후 나타나는 도상이며, 사천왕사가 건립된 전후인 7~8세기에는 신라, 일본 뿐 아니라 당대 불교미술의 중심지였던 중국 당나라에서도 팔부신장의 형상이나 숫자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발굴 보고서가 나오지않은 상황이어서 학계에서는 녹유신상전의 전체가 원시적인 팔부신장일 것이라거나, 혹은 녹유전은 사천왕상이 맞지만, 일부러 1개상은 빼고 부착한 것이라는 등의 끝모를 입담들만 떠돌고 있다. 목탑터의 발굴이 녹유전의 수수께끼를 풀어주기는커녕 더욱 의문을 부추키는 형국이 되어버린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윤형원 학예관은 “서탑의 신상 조각이 세 종류로 정리된 이상, 동쪽의 목탑을 추가 발굴하더라도 결과는 거의 다르지 않을 것”이라며 “녹유전 조각이 사천왕상일 것이라는 통설은 신중한 재검토가 불가피하다”고 단언했다.
사실 사천왕상과 팔부신장을 알려면 나라와 왕실을 지키는 호국불교로 기틀을 닦은 이 땅 고대 불교의 독특한 신앙체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천왕은 부처님이 깃든 불국토의 사방 세계를 지켜야 한다. 사천왕과 팔부신중은 일종의 경호 부대다. 위계관계가 사천왕이 장군급이라면 용, 야차, 건달바 같은 팔부신장은 그 아래 장교 격이다. 나라의 평화를 보장하며, 국난 재앙을 예방하는 사천왕의 권능과 영험에 대한 언급은 5세기 인도,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이란 호국경전에 나온다. 신라인들은 바로 이 불경 구절에 착안해 당시 통일전쟁과 당의 침입으로 위난에 빠진 국가의 운명을 구하려고 사천왕 신앙을 널리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천왕사 같은 관련 사찰과 불탑 등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맥락을 증거하는 사적이나 역사기록 등을 통해 사천왕사터의 녹유전 부조들은 당연히 사천왕 것이라는 게 후대 학계의 일반적 심증이었지만, 막상 뚜껑을 여니 뜻밖에도 더욱 혼란스런 결과가 나타난 셈이다. 강우방 교수는 “녹유전 신상이 사천왕이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다. 적은 수량이나 네 번째 유형의 사천왕 조각을 내가 분명히 찾아냈고 동탑터도 아직 발굴하지 않은 이상, 좀더 발굴 결과를 기다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 학술대회 앞두고 논란 가열될 듯
내년부터 동탑터 발굴에 들어갈 계획인 국립경주문화연구소도 ‘단언은 금물’이라며 녹유전 유물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서탑과 대칭되는 동탑의 경우도 그 얼개가 사실상 같았을 것이란 전제를 감안한다면 동탑 터에서 녹유 전돌의 신장상이 서탑과 달리 네 종류가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연구소 관계자들의 말이다. 한편 연구소쪽은 탑터의 발굴 결과를 정리하기 위해 올 연말이나 내년 초 강 교수를 비롯한 국내 주요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학술대회도 준비할 예정이어서 논란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경주 사천왕사는 670~671년 명랑법사가 오방신을 엮으며 나라 지킴의 기원을 올리는 문두루 비법을 써서 당시 신라에 침입한 당나라 군대를 내쫓았다는 호국 전설의 발상지다. 신라가 쇠락해갈 즈음인 9세기 절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이 들고있던 활의 활줄이 끊어졌다는 변고의 전설도 간직한 이 절터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아픈 비밀을 쏟아낼지, 학계는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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