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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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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의 ‘안나푸르나’

등록 2007-06-15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여성감독 이미례씨의 시나리오를 연극 무대로 옮긴 국내 첫 산악연극 </font>

▣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히말라야 고봉 안나푸르나를 향해 기어오르고 분투하는 세 명의 여자들. 사나이 못지않은 그네들의 우정, 좌절, 이별. 이런 설정을 담은 자작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려고 여성감독 이미례씨는 7년여간 갖은 애를 다 썼다. 문화판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고, 모금도 했다. 돈 벌려고 밥집도 차렸다. 그런 분투 끝에 작은 물꼬가 터졌다. 제작자 겸 연출자를 자원한 김주섭 아트넷코리아 대표의 결단으로 묵은 시나리오가 국내 첫 산악연극 로 몸을 바꿔 무대에 오르게 된다. 6월15~3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이 무대다.

“쌓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너무 편안해요. 자식 제대로 출가시킨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이씨는 사탕 받은 아이처럼 신이 났다. 1980년대 청소년물 감독으로 주가를 올렸고 2년 전부터 인사동 사거리에서 남도음식집 ‘여자만’을 운영하는 주모로 일하는 그는 이제 원작 시나리오 작가로 제작에 참여한다. 등 흥행작을 만든 중견 제작자 김씨는 시나리오를 보고 첫눈에 여자들의 인간 드라마에 ‘필’을 받아 연출을 자원했다.

실종된 여성 산악인의 실화가 바탕

자유소극장에서 배우들과 소품을 처음 놓고 맞추는 무대 세팅날인 6월5일 오후 끝내 들뜬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전시장으로 이씨는 줄달음질했다. 사실 그에게 를 연극화하기까지의 곡절은 안나푸르나의 실제 험로와 비슷했다.

“이 연극은 거의 10년 동안 만들어진 셈이에요. 99년 산악인 엄홍길씨와 안나푸르나를 같이 등반하다 실종된 여성 산악인 지현옥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거지요. 탄탄한 줄거리, 인물 캐릭터 등에서 호평을 받긴 했어요. 하지만 고봉에서 엇갈린 여성 산악인 3명의 인생사를 다룬 테마에 대해 한결같이 검토 단계에서 퇴짜를 놓더군요.”

결국 흥행성이 문제였다. 등 비슷한 시기에 크랭크인한 산악영화들이 호평을 얻지 못하면서 제작자들의 기피 대상으로 전락했다. 문예진흥기금 지원도 받았으나 실제 큰 돈줄이 잡히지 않아 반납해야 했고, 산악인·영화인 기금 모금도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시나리오 내용도 수십 번 뜯어고치기를 되풀이했다. 좌석 200석도 안 되는 소극장 공연이지만 이 감독의 기쁨과 설렘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숙원을 풀었다고 되뇌는 그와 함께 소극장 입구를 들어가니 연출가 김주섭씨가 나타났다. 반갑게 서로 시선을 나누자마자 입담꾼 이 감독이 “배우들 훈련이 잘되고 있어요?”라고 묻고는 걸걸한 목소리로 김 연출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연극대본 고친 것 맘에 들어요. 영화 만들 때도 도움이 될 거야.” “어유, 훈련비가 배우 개런티보다 더 드네. 암벽만 아니라 알통 만드는 피트니스 훈련도 해야지 체지방 관리도 해야지…. 걔네들 훈련이 너무 고돼서 만날 울어요, 울어….” “손바닥 자체가 벌집이야 벌집….” “그래야 무대에서 깡이 나오지, 힘이 나오지…. 돈 들이고 힘들여 하는 건데 농땡이칠 수 없지요.”

배우들은 인공암벽에서 맹훈련 중

연극만으로도 는 이전에 볼 수 없는 특이한 구도를 자랑한다. 주연인 여배우 3명 김보영(현정 역), 정유미(희서 역), 윤현길(선주 역)은 똑같은 산악훈련을 받는다. 등반가 박영석씨의 지도 아래 2003년 아시아 볼더링 대회 우승자인 김자하씨와 여성 암벽등반 1인자인 김인경씨의 트레이너 훈련을 받고 있다. 5일에도 종일 배우 세 명은 서울 우이동 북한산 인수봉 아래 인공암벽에서 맹훈련을 받고 소극장으로 와서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큐적 특징에서 영화화할 것들을 연극으로 옮겨오다 보니 산악 빙벽 등반 연습장, 암벽 등의 배경무대를 설치하는 것부터가 장난이 아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 층고가 높고 공간 전환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소극장은 안성맞춤이다. 층고 높이가 20m에 육박하는 극장이 다른 곳에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기 좋게 이런 암벽들을 세워 극의 분위기를 살리느냐가 과제다. 2년 동안 끈질기게 대관을 간청한 끝에 지난해 9월에야 공간을 따냈다. 벌써부터 배치를 둘러싸고 김 감독과 협력 연출자, 디자이너 사이에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 암벽을 실제 올라타고 떨어지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적절한 배치는 안전과도 직결된다. 옆방에서는 격정적인 토로를 펼치는 배우들의 대사 연습이 벌어졌다. 주역인 희서 역을 맡은 배우 정유미씨는 “목숨을 걸고 오르는 등반가들은 연극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지점이 있어 보이는데, 그걸 연극에서 표현한다는 게 좀 부담스럽다”고 했다. 등반 장면을 실연하는 첫 연극에 볼거리보다 연기에서 드러나는 인간 내음을 더욱 부각하는 메시지 전달도 만만치가 않다.

연출가 김씨에게도 는 첫 등정의 무대나 다름없다. 고려 삼별초를 다룬 첫 연출작이 하필 1979년 10·26 사태 바로 다음날 개막해서 셔터를 내리고 비공개로 상연했다. 삼별초가 허수아비 왕을 처단한 내용이어서 재공연은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중견 제작자로 자리를 굳히면서도 간직했던 연출 무대의 소원을 30년 만에 이룬 셈. 는 극중 인물뿐 아니라 원작 시나리오를 쓴 이씨나 연출을 다시 시작한 김씨에게도 또 다른 등정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펙터클한 산악 장면이 아니라 등반 과정에서 펼쳐지는 여성 산악인의 우정, 인간적 관계에 밀도감을 주려고 한다”며 “소극장이라 단기적인 흥행 성과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산은 하나의 다른 세계”

극중에서 주인공인 현정의 안나푸르나 등정은 실화처럼 행복한 성공으로 끝나지 못했다. 셋은 안나푸르나를 목표로 뭉치지만 주위 여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현정만 히말라야로 갔다가 사고로 실종된다. 친구 희서는 현정을 찾으러 안나푸르나에 왔다가 눈 구덩이에 빠져 조난당한 뒤 현정의 영혼과 만난다. 현정은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다더라. 그 산은 하나의 다른 세계”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이 감독의 숙원이 걸린 연극 는 이 경구를 화두로 삼으며 같이 등반할 관객을 찾고 있다. 평일 저녁 8시, 토 오후 4~7시, 일 오후 3~6시, 1만5천~3만5천원. 02-6000-67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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