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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어머니가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등록 2007-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1부 끝내는 만화 , 작가 김은성씨와 어머니 이복동녀씨를 만나다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계간지 에 연재하는 김은성의 만화 가 잠깐 쉼표를 찍는다. 5호에 11화로 1부를 끝내는 것이다. 곧 2부는 시작하지만 작은 매듭을 핑계 삼아 그간 궁금한 걸 물으러 서울 잠실의 작가 집으로 달려가 너른 방에 앉았다. 고운 어머니는 옆에 앉으시고 참외와 사과를 깎아놓으신다.

는 어머니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엄마! 호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자”면 “집에 할 일도 많은데…. 그래! 마시고 가자”라고 답하고, “엄마는 일중독이야”로 맞받아치는 딸과 어머니의 대화가 만화를 열고 닫고, 어머니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본론을 이룬다. 어머니는 자그마한 실마리만 있어도 고향을 생각해낸다. 어머니 고향은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군에서도 신북청면 보천리 미산촌.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서 빨래가 그리 쉬운 동네에는 이씨 성을 가진 40호 정도 되는 집들이 모여 농사를 짓는다. 3시간을 걸어가면 있는 바닷가에는 미역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은 1927년생 어머니 이복동녀(어렸을 때 이름 놋새)씨의 기억력이 보물이다. 국보급 보물이다. “돈이 있으니까 옆집에서 꾸러 오면 떼와 드리는데 내가 열쇠 노릇을 했지. 어디 적지 않아도 자는 나를 깨워서는 물어. 그때 꿔준 돈이 얼마냐 하고 말이지.” 딸인 김은성씨도 그런 점을 느낀다. “어머니는 저랑 반대예요. 저는 공상이 많은 타입이라 길을 나가면 꿈을 꾸는데 어머니는 무슨 가게가 있는지 그 가게 앞에 놓인 게 넓이가 얼마고 길이가 얼마인지 상세하게 기억을 해내세요.”

그렇다고 100% 기억은 아니다. 물꼬를 풀고 물길을 잡는 건 김은성씨다. 가다가 막히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 둑을 튼다. 풀어내는 이야기가 이리저리 종잡을 수 없을 때는 다시 올라가 꼬치꼬치 캐물어 길을 만든다.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상상력이 발휘되기 때문이란다. 어머니는 “내가 본 게 아니라 외할머니가 봤다는 이야기를 내가 그때 들었어”라 하시며 기억을 돋워낸다. 김은성씨는 여기에 더해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본다. 거기에다 그녀의 특징인 ‘공상’을 보탠다.

그렇게 80년 전 이제는 가보지도 못하는 북청 마을이 사자놀이춤 놀듯 꿈틀댄다. (이야기 화자는 사알짝 ‘어머니’로 바뀐다.) 시집가기 싫은 도화선 언니가 을 빌려 “보천리 미산촌 도화선이 거산 발롱에 말이 났네 나는 싫소 나는 싫소 말을 끌기가 나는 싫소 에헤야 에헤” 노래를 부른다. 억석이 오빠가 앓는데 신들린 작은어머니가 “억석이 할애비 귀신이 씌어 내가 죽겠다! 네가 점을 쳐야 내가 살고 네 아들도 살아. 안 그러면 사대 독자 네 아들이 죽는다”고 거품을 물고, 어머니는 “난 점은 못 친다. 사대 독자가 아니라 십대 독자가 죽는대도 내가 눈 깜짝할 줄 아느냐”며 호통을 한다. 어머니는 그 길로 집 고방에 달려가 명주, 삼베 좋은 것들로만 모아둔 열두 동이 신줏단지를 작살내버린다. 꽃이 환하게 웃는 것같이 잘생기고 똑똑한 위대는 부인을 두고도 옆 동네 아가씨한테 상사병이 난다. 어머니는 꾀를 내 부인 머리를 풀어 방으로 들여보내는데 위대는 “어저께만 왔어도 내 처자를 그냥 안 보냄. 나는 이제 할 수도 없음”이라며 “처-어-녀-”를 뱉으며 목숨이 끊어진다.

새록새록 살아나는 기억은 기록이 된다. “얼마 전에 서울대 교수(안병직 교수)가 토지 수탈 없었다, 수탈에 관련한 소송이 기록에 없다라고 이야기하던데, 우리는 소송을 했다. 소송을 해서 이겼다.”(3회 ‘근판이의 됨됨이’) 일정 앞잡이 노릇을 하던 근판이 산이 5정보가 넘으면 국유지라며 내놔라고 했고 집안은 5년을 걸려, 집안의 돈을 다 끌어들여 소송을 했다. 그리고 “일본놈 세상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이긴”다.

연재되지 않은 ‘0회’(1회의 전편)도 5월에 나올 단행본에는 실린다. 그러니까 딱 100년 전 1907년, 외할머니가 어머니의 ‘시이’(형제)를 갓 낳았을 때의 일이다. 시아버지가 병이 났는데, 먹을 게 마땅찮아서 어머니가 젖을 짜서 드렸다. 그런데도 시원찮아서 아예 물렸다. 자식과 시아버지가 함께 젖을 먹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앞으로 진행될 2부는 일제시대 말 울며 한 결혼과 거제도로 피난가는 전쟁 이야기를, 3부는 충청도에 정착하고 은성씨를 낳는 1965년까지를 푼다. 4부는 현실에서 가까운 시기를 왔다갔다 하면서 진행될 예정이다. 4부까지 끝내게 되면 장장 100년의 세월이 담기게 된다.

김은성씨는 늦게 만화를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학과를 대학원으로 다닌 뒤에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웹마스터로 일했다. 옆에서 봐왔으니 환상도 없던 만화 그리기를 2003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전문교육을 수강하면서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가 나온 만화가 (새만화책 펴냄)이고 졸업작품이 ‘0회’였다. “어머니가 그러신다, 작가가 대단한 줄 알았다.” 이제 유명해지고 그러면 TV에서도 부르고 그러겠다고 말씀드려본다. “나는 별론데, 어머니는 좋대요.”

김은성씨는 ‘자기만의 방’이 없다. 아랫목에 언제라도 드러누울 수 있게 이불이 깔려 있고 이야기를 도란도란할 수 있는 밥상이 놓여 있다. 김은성씨는 거기 책상에 앉아 몇 시간이고 앉아 그림을 그린다. 그럴 때 불쑥 어머니는 오랫동안 하지 않아 없는 줄 알았던 기억을 불쑥불쑥 쏟아놓는다. 불쑥 꺼내는 이야기에 김은성씨는 재빠르게 녹음기를 갖다댄다. 그냥 적는 게 좋지만 녹취를 해서 들으면 그냥 지나쳤던 고운 말들이 받아쓰기 좋게 박히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엄마가 죽고 자기만의 방을 가졌을 때 진정 작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난 엄마도 살아 있고 내 방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엄마는 엄마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할 것이며, 나도 나의 일을 해나갈 것이라는 거다.”(‘내 어머니에 대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며’) 그 도란도란한 방에 100년의 역사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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