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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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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윤계상을 사랑하나요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SBS 의 사랑할 만한 남자 채준 역 맡은 윤계상…자신의 매력을 살린 캐릭터로 가수 출신 연기자의 가능성 보여줘

▣ 강명석 기획위원

진영(이미연)은 채준(윤계상)을 사랑한다. 그는 채준이 어려도 사랑하고, 고아여도 사랑하고,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사랑한다. 그리고,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채준이 자신의 남편이 될 뻔했던 연인 재훈(유태준)을 죽인 사람이라는 걸 알아도 채준을 사랑할 것이다. 대체 왜 사랑하냐고? 제목이 말해준다. SBS 주말드라마 . 물론, 이건 진부할 수도 있다. 그저 설정만이라면, ‘죽은 연인을 죽인 남자’라는 설정은 ‘알고 보면 친남매’나 ‘불치병’이라는 설정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 이라니

그런데 놀랍다. 정말, 채준은 사랑할 만하다. 적어도 채준이 누굴 죽였는지 몰랐던 진영이라면, 채준은 진영 같은 여자에게 치명적이다. 진영의 친구인 현철(이종혁)은 모든 걸 다 갖췄다. 착하고, 돈 많고, 전과도 없다. 그러나, 현철은 죽었다 깨어나도 채준처럼 진영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이라며 자기 요리 솜씨를 자랑하지도, 진영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개그 프로그램의 개인기를 따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웃음 뒤에 집에서 홀로 눈물 흘리지도 않을 것이다. 진영이 채준의 집에 찾아왔을 때 문틈 사이로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는 채준을 보는 순간, 진영은 그저 밝게 사는 소년 대신 모든 고통을 안고 꿋꿋이 살아가는 남자를 발견한다. 자꾸 뭔가 주고 싶고, 그 재롱을 보고 싶은 ‘잘 자란 아들’ 같으면서도, 동시에 평생을 외롭게 산 진영이 기대고 싶을 만큼 강건하고 바른 정신을 가진 남자.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사랑에 미치는 수밖에.

그리고, 이것은 가수 윤계상이 아닌 배우 윤계상의 가치다. 설정만을 본다면 채준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다. 그는 평생을 가난한 고아로 살았고,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신 탓에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죽였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삶에 긍정적이고 따뜻한 태도를 가진다. 채준은 그 스스로도 진영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따질 만큼 꿈을 가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누구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민희(김은주)와 그의 아버지를 챙길 만큼 이타적인 삶을 산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하고 반듯하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현철을 통해 신분상승을 하고 싶은 민희의 캐릭터가 더욱 쉽게 수긍이 간다. 그러나 윤계상은 그런 채준의 캐릭터를 그래도 ‘착한 것’만큼은 포기하기 싫은 한 남자의 절실한 의지로 보여준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사는 남자의 의지. 그건 윤계상만이 가진 고유의 캐릭터다.

윤계상·윤은혜·에릭의 이미지

윤계상이 그룹 god 시절에 찍었던 뮤직비디오 에서도, 영화 에서도 그랬다. 그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위험한 야심으로 가득 차거나, 답답한 현실에 반항하는 대신, 늘 무표정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이다가 가끔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의 비행기 정비처럼, 의 발레처럼 자신이 뭔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걸 만났을 때, 그는 해맑은 소년이 되면서 예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걷고 싶은 길로 유쾌하게 걸어갔다. 소년이 더 이상 야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윤계상은 미래가 불안한 청년의 일상성을 유지하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은 채 열심히 살아보려는 따뜻한 청년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건 요즘 드라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어떤 ‘평범한 착한 청년’에 대한 가능성이다. 물론, 윤계상의 연기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유의 미소를 앞세운 표정 연기나 비교적 안정된 대사 처리는 좋지만 발성은 아직 불안하고, 분노나 슬픔을 표현할 때 감정을 쏟아내지 못해 극단적인 감정이 표출되는 순간 강렬한 인상을 주는 데 약하다.

그러나 에서 윤계상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던져준다. 기본적인 연기력은 뒷받침돼야겠지만, 시청자가 가수 출신 연기자에게 호감을 느낄 때는 가수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실제와 같은 몰입감을 줄 만큼 자연스럽게 어울릴 때다. 윤은혜가 연기력 논란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과 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궁과 시골의 포도밭이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들어가 고생하면서도 그것을 견뎌내는 귀여운 소녀의 이미지가 윤은혜의 귀엽고 건강한 캐릭터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고, 에릭(문정혁)은 의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간 남자보다 이나 처럼 무식하고 거칠어도 미워할 수 없는 말썽꾸러기 캐릭터를 연기할 때 훨씬 매력적이다.

폭넓은 연기는 그 다음에

단지 연기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 전에 가수가 연기를 해야 할 이유, 그만큼 그가 드라마 안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줄 때 시청자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김동완이 최근 SBS 에서 여자를 배신하는 나쁜 남자의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그가 착한 남자의 캐릭터를 여러 차례 하면서 자기 영역을 굳혔기 때문이다. 가수 시절에도 실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캐릭터가 있어서 살아남았듯, 연기자가 된 가수들 역시 자신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연기력으로 인정받겠다”라거나 “폭넓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말은 그 다음에 해도 된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들이 이제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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