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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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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모델 만들기’인가

등록 2007-03-01 00:00 수정 2020-05-03 04:24

같은 긴박감과 흥미 주지 못하는 …지망생이 아닌 톱모델이 주인공되어 뽐내는 모습만 보다가 따분해지다

▣ 이명석 저술업자

“거울아, 거울아, 대한민국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10년 전만 해도 거울들은 대체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스코리아요.” 일렁이는 세태의 빛에 따라 대답은 조금씩 바뀌지만, 요즘 거울들의 의견은 확실히 다른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지성과 미모를 함께 갖추려는 미스코리아의 어정쩡한 시도와 위선적인 말투는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있다. 지성은 아무려면 어때? 확실한 미모가 최고. 그래서 거울들은 대답한다. “슈퍼모델. 미친 몸매. 패셔니스타.”

제1의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가 제1의 선망이 된 직업을 소홀히 다룰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여성 연예인의 등용문이 된 슈퍼모델 선발대회를 제외하고 패션 세계가 방송의 중심에 들어오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슈퍼모델 선발대회 역시 모델을 뽑는 행사인지, 예비 연예인을 뽑는 행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도 많다. 오히려 선발대회에서 1위를 한 톱클래스 패션모델의 방송 진입은 만만하지 않았고, 화면에 등장해도 예쁜 병풍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소라, 차승원 등의 활약은 무시할 수 없지만, 방송인이나 배우로 전업한 이후에 빛을 보게 됐던 것이지 패션모델로서의 모습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방송의 아이콘이 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제외하곤, 있는 그대로의 패션 직업군의 존재감을 가지고 방송에서 확실한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었던가?

‘정말 아닌’ 후보의 ‘진짜 모델’ 되기

이제는 본격적으로 뭔가 움직이는 듯하다. 여러 케이블 채널들이 젊은 여성 시청자를 타깃으로 패션과 스타일에 대한 다양한 코너들을 쏟아내면서, 움직이는 패션잡지들이 하나둘 화면 속에 펼쳐지고 있다. 자기들만의 패션 성채에서 뛰어놀던 모델들도 자기 직업의 존재감을 유지하면서 방송까지 장악하기 위해 급속히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패션쇼장의 런웨이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TV 안에서도 들러리가 아닌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강한 열정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타이라 뱅크스가 진행하는 패션모델 선발 리얼리티쇼 (America’s Next Top Model)이 상당한 인기를 모으면서 모델 세계의 내면에 대한 방송의 관심이 본격화된 듯하다. 박둘선, 송경아, 장윤주가 이끄는 국내판 모델 선발 리얼리티쇼 도 남자 모델 편으로 시즌을 이어갔고, 슈퍼모델 선발대회의 주관사인 SBS는 드라마넷을 통해 대회의 이면을 기록한 세미 리얼리티쇼 20부작 를 방영했다. 패션디자이너 선발대회인 등 스타일, 헤어, 뷰티, 명품 같은 모델 바깥의 패션 세계에 대한 프로그램도 넘쳐나고 있다. 심지어 의 육총사까지 패션쇼장에 뛰어드는 무모한 시도를 보여주지 않았나?

앞에서 나는 지성을 내던져도 좋은 ‘미모의 시대’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미모가 곧 지성인 시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단지 모델들의 예쁜 모습을 만끽하려면 완성품 ‘미친 몸매’의 장윤주가 등장하는 CF를 보는 게 낫다. 동아TV 등에서 방영하는 SFAA(Seoul Fashion Artists Association)와 해외 컬렉션을 보는 것만도 벅차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리얼리티쇼를 통해 패션계의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얼리티쇼이니까 후보들 간의 머리끄덩이 싸움을 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 같은 민간인이 보기엔 ‘정말 아닌 것 같은’ 후보가 훈련을 통해 진짜 모델이 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는 즐거움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대리만족도 적지 않지만, 그 모델들처럼 예뻐지는 방법을 알면 나 역시 변신할 수 있다는 기대도 빠뜨릴 수 없다.

제목 그대로 “나 모델이야”자랑만?

미스코리아는 ‘미(美)의 전령사’라는 말을 썼다. 슈퍼모델은 ‘미’라는 이 시대 가장 유용한 ‘지식의 전령사’다. 그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몸으로 똑똑함을 광고한다. 나는 당신들이 모르는 다이어트 비법을 알고 있어. 매일 밤 삼겹살에 소주로 야식을 먹어도 팽팽한 피부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갖고 있지. 동대문 보세숍만 돌아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어. 하지만 바쁜 사람은 내가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오는 게 좋을 거야. 그 밖에도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건강한 두피, 팽팽한 아랫배, 백옥 같은 치아를 만드는 방법… 뭐든지 가르쳐줄게.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 같은 하드웨어를 갖출 유전자를 얻는 방법은 알려줄 수 없다는 거야.

패션모델들의 방송계 진입은 이미 대세인 것 같다. 그러나 TV 안으로 들어오는 예쁜 그들의 발걸음이 런웨이의 캣워크처럼 유연하고 매끄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은 왜 같은 긴박감과 흥미를 주지 못할까? 제작비와 방송 환경 등 수많은 이유를 들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결정적으로 그 프로그램의 주객이 뒤바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은 영어 제목처럼 ‘넥스트’의 모델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은 세 명의 톱모델 ‘언니’들이 제목처럼 “나 모델이야. 나 모델이야”라며 뽐내는 모습만 보여준 것 같다. 남자 편이 현역 모델들의 비즈니스 창업 프로젝트로 간 건, 어쩌면 자연스럽고도 따분한 행로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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