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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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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후, 통하였느냐

등록 2007-01-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선정적이라는 소문에 개봉 전 특별상영회까지 매진된 영화 …성기 노출, 동성애, SM 등 화려한 화면 위엔 인간의 외로움 넘쳐나

▣ 황진미 영화평론가

는 재기발랄한 퀴어영화 의 감독 존 카메룬 미첼의 신작으로, 2006년 칸영화제에서 선을 보인 뒤 난교 장면과 실제 섹스신이 나온다는 풍문과 더불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유럽영화제에서 전회 매진되는 등 비상한 관심을 모은 작품이다. 본 사람들이 전하는 ‘일 년치 섹스신을 다 봤다’ 혹은 ‘상상할 수 있는 체위는 다 봤다’ 등의 단평과 더불어 이탈리아에서도 상영 금지됐다는 후문은 시네필들의 호기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격렬한 섹스 뒤에 가식적 대화

우리나라에서도 수입돼 등급 신청을 해놓은 상태라지만, ‘제한상영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를 온전한 필름으로 상영관에서 보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가운데, 지난 연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특별상영회가 있었다.

2회 모두 일찌감치 매진됐는데, 이러한 열기는 평상시 ‘서울아트시네마’의 낮은 객석 점유율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영화는 전반부의 다소 ‘쇼킹’한 장면들을 거치면서 노출의 수위에 눈이 익숙해지면, ‘선정적인 성 묘사(描寫)’라기보다는 ‘본질적인 성 묘파(描破)’에 가깝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숏버스’는 ‘하자 있는 떨거지들’을 뜻하는 은어이자, 실제로 브루클린에 있는 언더그라운드 동성애 섹스바 이름이라고 한다. 영화 속 ‘숏버스’ 역시 불법 지하 섹스살롱이다. 영화는 섹스에 갈증과 고민을 느끼는 갖가지 취향의 뉴요커들이 그곳에 모여, 그들의 고민을 솔직하게 풀어놓고 행위로써 답을 찾는 여정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하게 그리고 있다. 성기 노출은 물론, 동성애 섹스, SM(사도마조히즘), 혼음난교가 빈번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느낌은 포르노와 사뭇 다르다. 그 이유는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성적 쾌락’ 아니라, ‘성행위를 통해서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첫 시퀀스에서 한 남자가 기묘한 요가 자세로 자위를 하며 셀프 카메라를 찍고, 두 명의 이성애 커플은 격렬한 섹스를 하고, 한 쌍의 SM 커플은 채찍을 휘두르고 있지만, 곧이어 관객들은 그들의 쾌락이 아닌 외로움에 맞닥뜨린다. 자위하던 남자는 이내 눈물을 흘리고, 캠코더에는 자살을 향한 셀프 영화가 담기는 중이다. 그토록 격렬한 섹스와 흡족한 섹스 뒤 대화는 가식이고, 여자는 오르가슴에 갈급해하며 남자는 열등감에 빠져 있다. SM 커플은 일절 대화가 되지 않는다. 남자는 채찍을 든 여자에게 하릴없는 정치적 질문들을 던지고, 여자는 돈을 지불하는 부자 남자를 경멸하며 채찍을 휘두른다.

‘연애’를 하고 싶은 섹스 치료사

이들은 모두 적극적인 성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성적 소외를 겪고 있다. 그들이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에스에머(SMer)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성적 취향을 갖든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상대와의 합일감과 평화’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자신이 섹스 치료사이면서 정작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소피아가 SM 플레이어 세브린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세브린은 소피아에게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게 해주겠으니, 자신의 문제를 상담해달라고 한다. 그녀의 문제는 ‘연애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집을 갖고 싶고,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것’이지만, 모두 너무 비싸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어떤 외설적인 대화보다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두 번째 장면은 게이 남자와 SM 플레이어가 어두운 곳에 갇혀 주고받는 대화이다. 그들은 성적인 행동을 암묵적으로 요구받지만, 그들이 ‘하는 짓’은 ‘진실한 대화’이다. 게이 남자는 ‘거리의 남자’였다는 비애감을 SM 플레이어의 자기 환멸에 공명시킨다. 세 번째는 원격 자위기구를 삽입한 소피아가 남편에게 ‘내 생각이 나면 버튼을 누르라’며 리모컨을 쥐어주고 자위기구가 작동될 때마다 남편을 떠올리지만, 리모컨이 엉뚱한 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끼는 장면이다. 물리적 자극이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정서적 일체감이 성적 쾌감의 핵심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영화는 다양한 성행위를 통해, 성적 흥분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성의 본질은 첫째 인간은 외롭다는 것, 둘째 섹스는 외로운 인간들이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 셋째 그 소통이 많은 이들에게서 성공적이지 않으며, 이를 위해 부단히 탐구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진실을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전하면서, 마지막에 흔쾌한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영화의 3분의 2 지점까지 견지돼오던 문제의식이 별안간 휘발되면서 은총처럼 주어지는 해피엔딩이 팬 서비스마냥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섹스는 좋은 것, 행복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전하는 듯하다. 물론(!) 섹스는 좋은 것이다. 남자랑 하느냐 여자랑 하느냐 트랜스젠더랑 하느냐, 둘이 하느냐 셋이 하느냐 떼로 하느냐, 삽입성교를 하느냐 SM을 하느냐 관음을 하느냐보다도 ‘(소)통하였느냐?’를 고민할 때 더욱 좋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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