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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록 2007-01-06 00:00 수정 2020-05-03 04:24

‘노동’이란 주제로 여성의 현실을 그린 만화 …성희롱·출산휴가·최저임금 등 10가지 주제로 공감하며 연대하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언젠가 남녀평등에 관한 간단한 퀴즈를 ‘보면서’ 미심쩍어했던 기억이 있다. 출산 여성에게 최장 3년의 유급휴가를 주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탁아소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환경에서 생활하는 유럽의 여성이 12주의 육아휴직에 양육비 지원이 거의 없는 미국의 여성보다 출세 사다리에 오를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었다. 퀴즈의 출제 의도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복지 정책에 따른 과잉 친절이 여성을 집에 머물러 있게 하거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는다는 친절한 ‘해설’도 곁들여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여성들이 일자리에서 장기간 벗어난 뒤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작가가 현장조사 하며 주제 파고들어”

하지만 출세에서 멀어지는 유럽의 여성을 안타깝게 바라볼 일은 아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여성의 권리: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모두 115개 나라 가운데 92번째의 남녀 불평등 국가로 꼽혔다.

이집트·요르단·방글라데시 등과 같은 처지에서 선두 자리를 휩쓴 북유럽 3개국(스웨덴·노르웨이·아이슬란드)의 여성처럼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차별과 불이익을 떠안을 수는 없으리라.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아래 한여노협)가 2년 동안의 산고 끝에 무크지 형태로 내놓은 노동만화 (길찾기 펴냄)는 유리 천장은 고사하고 일자리마저 위태로운 여성 노동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여성이 늘고 고임금의 전문직 여성이 속속 등장해도 그늘진 여성의 삶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의 쉼없는 이어달리기는 불편하고 고단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취업에서부터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대학 졸업생의 성별 분포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7%(남성 84%)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2만6천여 명이 줄었지만 여성은 5천 명이나 늘었다. 해마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을 정하지만 최저선의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가 수두룩하다.

이렇듯 여성 노동자는 전 생애에 걸쳐 고용 불평등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노동만화 는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여성 노동의 일상적 풍경을 기발한 웃음과 눈물 한 방울로 풀어낸다. 한 여성 노동자의 전 생애가 만화에 담겨 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나이대에 맞춤한 주제가 튼실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기획한 배진경씨는 “현실을 드러내는 적절한 주제를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여성 노동 상담실인 ‘평등의 전화’에서 이뤄진 10여 년 동안의 상담통계를 분석한 뒤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 작가들이 워크숍을 갖고 현장조사를 하면서 주제를 파고들었다.”

하기 힘든 말, “저 아이 가졌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는 여성이 딸에서 어머니로 성장하는 과정을 성차별·성희롱·출산휴가·최저임금 등 10개의 열쇳말로 풀어낸다. 그토록 익숙한 말들이 여성의 삶을 여전히 옥죄고 있다는 사실에 답답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난나씨의 ‘김 차장의 직장생활백서’는 넘기 힘든 성차별과, 노동권과 인권을 유린하는 성희롱이 흔한 현실임을 실감케 한다. 공인재무설계사(AFPK), 은행 금융자산관리사(FP) 등의 자격증을 가진 신입사원을 기다리는 것은 스위스 커피머신과 오픈바 스타일의 최신식 주방과 상사들의 커피 취향 목록이었다.

그런 일들을 견디지 못하면 회사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만일 커피머신 노릇을 마다하지 않으면 성희롱이 기다리고 있다. “역시 여자랑 일할 때면 흥분된단 말이야”라거나 “오늘은 치마 길이가 적극적으로 짧네”라고 말하는 자칭 페미니스트들과 어울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직장 풍경이 남의 일일 뿐이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화를 그린 난나씨는 “여전히 반복되는 오늘의 일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며 “누구나 만화를 보면서 공감하도록 재미를 양념으로 넣었을 뿐 상상을 보태지 않았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허구였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만화보다 훨씬 심하다”고 말했다.

그것도 출산휴가를 신청하기 전까지의 일일 뿐이다. 아직도 국내 기업은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에 거부감을 보인다. 정광숙씨의 ‘저 아이 가졌어요’는 저출산의 원인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도록 한다. 임신 사실을 밝히는 순간 여성 노동자의 미래는 시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등의 전화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3월까지의 상담 사례 가운데 57%가 임신·출산으로 인한 불이익에 관한 것이었다. 육아휴직은 차치하고 출산휴가마저도 쉽지 않다. 두 달 동안의 출산휴가를 복직투쟁으로 보낸 뒤 골병 든 여성은 만화 속 주인공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육아휴직 1년을 쓰고 출근하면 복직 신고를 하면서 해고 통지서를 받아야 한다.

유일하게 남성으로서 대열에 합류한 손문상씨는 유리벽에 갇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하루’라는 작품에 담았다. 여성 노동자 10명 가운데 7명이나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남성 정규직의 34.7%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그런 여성 노동은 손씨에게도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일터에 있어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여러 차례 비정규직 문제를 만화로 그렸는데 여성 노동자들의 일상은 더욱 암울했다. 그림 분위기만 봐도 빈곤의 악순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이력서’ 뒤 ‘빈곤의 여성화’

여성 노동자는 세월의 흐름을 절망 속에서 실감하게 마련이다. 일하는 사람이 되려고 ‘기나긴 이력서’(정혜용 신영희)를 써도 ‘빈곤의 여성화’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설령 일자리를 구해도 ‘몸살’(원혜진)을 앓더라도 하루짜리 휴가원조차 낼 수 없는 처지가 되곤 한다. 원혜진씨는 대학 건물에서 숨죽여 지내는 청소용역 여성 노동자를 만나 자료에 드러나지 않는 일상을 들었다. 휴식 시간에 만나려고 건물을 오갔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다리도 뻗을 수 없는 한 평 남짓한 계단 아래 공간이 쉼터였기 때문이다. 원씨는 그곳에서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 서강대분회 결성 비사를 들었다.

이렇듯 는 노동이라는 주제로 여성의 현실을 보여준다. 자칫 문제의식에 짓눌릴 수도 있지만 참여 작가들은 열쇳말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풀어냈다.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는 열쇳말이 남성의 가슴에 꽂히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불편함은 여성이 내미는 연대의 마음일 것이다. 는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을 담은 인권만화 과 에서 2% 모자랐던 재미도 충분히 살렸다. 10편의 만화 뒤에는 만화에 담지 않은 ‘현실 분석’도 곁들였다. 여성과 일에 대한 10가지 이야기 속에서 올해의 화두를 얻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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