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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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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가라사대] <더티 프리티 씽즈> 중에서

등록 2006-12-21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도훈 기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지?”
“왜냐면 우리는 니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니가 탄 택시를 운전하고, 니 호텔룸을 청소하고, 니 ×를 빠는 인간들이니까”

(2002) 중에서

런던으로 출장을 갔다. 낡고 눅눅하고 냄새나는 지하철에 앉아 있으니 온갖 언어가 들려왔다.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광동어, 독일어, 뭔지 모르는 아마도 아프리카 계열의 언어. 시끌벅적 용광로 런던은 언제나처럼 잘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방배동으로 향하는 버스는 좀 문제가 달랐던 모양이다. 그 시각 서른두 살 서울 시민 선아무개씨는 20대 한국 남자와 터키 남자를 열심히 두들겨패고 있었다. 뉴스에 따르면 이유는 단지 “버스 안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기분 나빠서” 였다고 한다. 선씨의 분노에는 몇 가지 함의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자기보다 더 배운 놈들이 배알 꼴린다는 심보다. 둘째, 동남아에서 온 것 같은 시커먼 개발도상국 촌놈이 고귀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못봐주겠다는 심보다. 가장 심각한 셋째,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쓰라는 가히 스킨헤드적 사고방식의 폭력적 발로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서울은 서울이지 로마가 아니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지 않는다. 물론 런던으로도 모든 길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이거다. 런던 사람들은 모든 길이 런던으로 통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울 사람들은 모든 길이 서울로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혹은 모른 척하고 싶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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