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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여인들, 시대를 사로잡다

등록 2006-12-14 00:00 수정 2020-05-03 04:24

500년 전 기생과 20세기 퍼스트레이디의 부활, 뮤지컬 와 …자신을 무한히 신뢰했던 두 여성의 극적인 삶에 오늘의 관객이 눈물 흘리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아무리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라 해도 생명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대를 초월해 폭넓은 지지를 받은 인물도 더러 있다. 대부분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극적으로 개척한 이들이다. 시대의 금기 혹은 통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도전과 열정이 있었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신화적 요소를 두루 갖춘 여성이 뮤지컬 무대에서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산다는 건 꽃과 같아”라며 ‘예술혼’을 유감 없이 드러낸 조선의 ‘황진이’와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라며 ‘성스러운 여인’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준 ‘에바 페론’이다. 이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부활하는 무대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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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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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황진이가 무대에서 부활할 것은 일찌감치 예견됐다. 여성을 내세운 현대적 사극이 다양한 방식으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드라마 은 아시아 시장을 강타하며 뮤지컬로 ‘버전업’을 꾀하고 있고, 판소리나 창극에 갇혀 있던 ‘춘향’은 무용과 발레 등의 무대예술로 거듭나면서 국내외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 대열에 조선 최고의 여류 예술가로 꼽히는 황진이가 합류하는 것은 때늦은 감마저 있다. 늦은 출발을 만회하려는 듯 드라마와 뮤지컬, 영화 등을 통해 ‘여성 드라마’의 절대 강자로 군림할 태세다. 마치 500년 세월의 벽을 넘어 오늘의 우리를 깨우는 듯하다.

뮤지컬 (12월25일까지·서울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는 당대를 풍미한 여성이 현재의 시점에 ‘환생’하는 무대로 크게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황진이는 뛰어난 시재(詩才)와 탁월한 미모로 당대의 선비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동양의 고급 창부로 일본의 ‘게이샤’와 함께 한국의 ‘기생’을 꼽을 수 있다.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지는 황진이에 관한 일화는 ‘시대극’의 주인공으로 그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뮤지컬 는 역사적 고증을 좇기보다는 사랑의 행로를 주목했다. 심지어 역적으로 몰려 죽음에 이르는 이사종도 황진이의 사랑 안에서 빛을 낼 뿐이다.

이런 황진이의 삶과 사랑은 작가적 상상력으로 복원됐다. 황진이의 삶이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사랑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과 애달픈 그리움, 강한 기개 등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매력을 발산한다. 영화 이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로 서구를 자극했다면, 뮤지컬 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세계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 자신의 삶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던 조선의 여성. 설령 시대를 알지 못한다 해도 황진이를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어쩌면 우리가 무대에서 만나는 황진이는 과거의 옷을 입은 오늘의 여성에 가깝다.

뮤지컬 는 다양한 기법으로 과거의 인물을 현대로 불러냈다. 이미 드라마 에서 화려한 의상과 춤이 있는 교방을 확인한 관객일지라도 무대의 황진이를 만나면 또 다른 탄성을 자아낼 수 있다. 500년 전의 과거를 살아 있는 현재로 드러내는 영상 기법이 공연을 지배한다. 사실 뮤지컬 에서 빔 프로젝터로 쏘는 영상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창 앞에 끌려간 사종이 등장하는 장면처럼 중요한 지점에 효과적으로 쓰이면서 집중도를 높인다.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무대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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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아닌 ‘탄생’에 초점

이처럼 뮤지컬 는 과거와 현재가 효과적으로 만나 공존하도록 했다. 만일 한국의 상징으로 따진다면 곡선과 원이 무대를 관통해야 한다. 하지만 황진이의 무대는 선과 면, 각 등이 맞물려 어우러진다. 곡선은 의상에 살포시 얹었고 원은 달빛에 드러나도록 했을 뿐이다. 미하엘 슈타우다허의 음악도 황진이의 환생에 한몫 거든다. 이방인이 전통과 음률을 제대로 껴안을 수 있을지를 염려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사건과 환상의 어울림을 절묘하게 포착했고, 테마곡 에 5음계 바탕의 각운까지 곁들이는 묘수를 부리기도 했다.

정말로 뮤지컬 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공연’으로 손색이 없을까. 2년여의 숙성 기간에 닮고 싶은 여자로 황진이를 그려냈고,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오늘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500년의 깊이가 무대에서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무대 뒤쪽과 옆쪽 공간이 부족한 탓에 영상 효과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무대를 과감하게 자르거나 영상 무대를 만드는 식으로 판타지 마법을 부리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뮤지컬 가 과거에서 건져올리는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방향을 선보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오래된 황진이가 오늘의 우리를 깨운다면, 20세기의 에바 페론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듯하다. 이미 30여 년 전에 세계적인 뮤지컬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에 의해 뮤지컬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우리에게도 의 추억은 싹텄다. 오랜 산고 끝에 탄생한 영화에서 에바 페론으로 분한 미국의 팝스타 마돈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만의 ‘공적’이 아니었다. 불꽃 같은 33년의 삶이 ‘성녀’(聖女)로 채색된 에바 페론의 이미지에 흠집이 났다는 생각에 국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화적 인물로 거듭난 에바 페론이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의 성공담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는 에바 페론의 인기를 실감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뮤지컬 (2007년 1월31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의 공연장은 평일임에도 빈 좌석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현재 관객 점유율이 90%를 웃돌며 샤롯데극장의 뮤지컬 보다 나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다. 영화보다도 극적이었던 에바 페론의 생애에 흠뻑 취하고 싶은 중년 여성들이 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리라.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라이선스를 통해 소개한 뮤지컬 의 흥행 코드는 화려한 볼거리라기보다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추억 연기에 있어 보였다.

작품성과 흥행에 자만한 건 아닐까

그렇다고 뮤지컬 가 추억의 선율을 절대 미덕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는 무대미술로 빛을 발한다.

나이트클럽이 있는 거리가 순식간에 주택가로 바뀌는 장면이나 밤하늘의 별이 내려앉는 모습, 자선기금 모금을 위한 군무 등에는 30년의 내공이 녹아 있다. 다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네 번째 걸작 레퍼토리에 대한 기대는 이전 공연의 성취를 뛰어넘지 못한 느낌이다.오리지널 무대를 바탕으로 런던 리바이벌 버전의 모던함을 접목했다는 무대는 창작 뮤지컬의 그것에 견줘 색다른 감흥을 전하지 못했다. 무대예술의 극치를 경험한 관객을 배려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이미 작품성과 흥행에서 성공한 자만심이었을까. 국내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 꼽히는 김선영, 남경주 등의 연기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배해선과 함께 에바 페론으로 분한 김선영은 노래만큼의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지 못했고 멀티맨 겸 체 게바라로 분한 남경주는 특유의 스타일이 드라마에 녹아 들어가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팀 라이스가 쓴 가사를 제대로 가다듬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에비타의 우리식 신화가 쓰여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황진이가 창작의 산고를 이겨내고 고군분투한다면, 에바 페론은 ‘에비타’라는 존경과 감동의 의미에 흠뻑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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