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의자 아버지와 자유주의자 딸이 새긴 10년… 영화 조국·희망·고향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북한을 보는 재일조선인 가족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한국적을 가진 딸이 조선적을 가진 아버지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오빠들과 조카들은 평양에 산다. 제주도 출신인 아버지는 15살 이후로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활동가였고, 오빠들은 1971년 귀국선을 타고 ‘조국’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는 젊어서는 전업활동가인 아버지 뒷바라지, 늙어서는 평양의 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밤낮으로 헌신했다. 딸은 모범가정의 문제아였다. 조국의 부름보다 자신의 선택을 우선했던 딸은, 혁명가정의 2세가 가야 할 길을 버리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인생을 택한다. 부녀는 갈등했고, 화해했다. 딸은 오사카와 평양을 오가며 가족사를 찍었다. 이렇게 10년을 새겨온 기록이 양영희 감독의 에 담겼다.
자유주의자 딸은 김일성주의자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나, 김일성주의자 아버지는 자유주의자 딸을 어떻게 용납하게 되었나를 보게 된다고 쓰려다 고친다. 그저 을 보면 울다가 웃다가 울게 된다고(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재일본 조선인 역사에, 역사가 가족에 남긴 상처에, 아니면 그저 가족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Must Have’ 영화다.
“내게 평양은 그리운 가족이 있는 곳”
은 내게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최고의 제목이다.
=제목에 ‘평양’은 꼭 넣고 싶었다. 납치사건 이후에, 대부분 일본인에게 북한과 관련된 모든 것은 밉게만 보인다. 그러니 ‘평양’은 도전적인 제목이다. 하지만 뉴욕, 서울처럼 단순한 도시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게 평양은 소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우리 가족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가족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넌다. 배에서 내려서 평양으로 가는 버스에서 안내원은 “전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수도 평양” 등 ‘공식 멘트’를 읊는다. 순간 차창 밖으로 스치는 입간판, ‘평양 16km’. 이어지는 감독의 내레이션. “나는, 내가 결코 조국의 품에 안긴 것도 아니며 혁명의 수도로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평양’ 앞의 ‘디어’는 다양한 얼굴을 지녔다. 때로는 형식적인 언사로, 진심을 담은 말로도 들린다. 감독은 부모, 오빠, 조카들, 저마다의 ‘디어 평양’을 말했다. “아버지는 15살 이후로 평양만 바라보면서 살아오셨다. 오빠들에게 평양은 희망을 품고 향한 도시다. 조카들에게는 고향이고. 평양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친근감과 존경을 담고 있다.”
2000년에 재일동포 취재를 다녀온 적이 있다. 평생을 총련에 헌신해온 사람들을 보면서 심란했다. 이만큼 속수무책인 역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해방 뒤 일본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들은 열심히 살았고 믿었지만, 반도의 역사는 그들의 믿음과 다르게 흘렀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그들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이토록 무서운 세월과 안타까운 역사를, 나는 알지 못한다. 2000년, 의 배경인 오사카 이쿠노에는 또 다른 ‘양영희들’이 있었다. 솔직히 그들을 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인생을 포로로 잡힌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김일성주의자인 아버지가 “(북한에 세 아들을) 안 보냈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어렵게 말하는 을 보면서, 오히려 깨달았다. 그들이 역사의 패배자든 아니든, 그들을 인생의 패배자로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저 누구에게나 인생의 짐이 있듯이, 그들에게도 짐이 있는 것뿐이라고.
가족을 이어주는 배, 만경봉호
북한이나 총련에서 영화에 대해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아버지가 후회하는 듯한 말을 하지 않고, 가슴에 훈장 달고 충성 발언을 하는 모습만 나왔다면, 오히려 총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굳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서 총련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다는 사람이 많다.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만경봉호 하면 선글라스 낀 간첩을 연상했던 사람들이 그 배가 가족을 이어주는 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동포들은 총련이든 민단이든 정치운동을 해오신 분들은 너무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라서 당황한다. 지금 얘기하듯이 북한에 간 사람들도 미쳐서 간 것이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일본은 차별이 심하고, 남한은 정치적으로 복잡했으니까. 심지어 일본 적십자와 언론도 ‘민족의 대이동’으로 미화했다. 일본 정부도 재일본 조선인을 일본 땅에서 내보내고 싶어 동조했다.
아버지의 한마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겠다.
=사람도, 국가도 다면적이다. 한 측면만 보고 규정지을 수 없다. 내복을 입고 부인을 좋아하는 귀여운 아버지와 수령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교조적인 아버지, 양쪽이 모두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다. 오빠를 보낸 것을 후회한다는 말도, 수령님께 충성을 다한다는 다짐도 모두 진심이다.
재일동포, 특히 총련계 2세들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각별하고 복잡하다. 영화 <go> 에서도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자식들은 반항한다. 양영희 감독도 한때는 아버지와 말도 하지 않을 만큼 불화했다. 그의 자유주의 기질은 의 저변에 흐르는 정서다. 감독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옷을 사오면, “제발 나를 옷가게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아이였다. 감독은 “결국은 어머니가 사온 옷을 내가 골라도 그렇게 해야 납득이 됐다”며 웃었다. 그러니 조직과 국가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인생과 불화할 수밖에. 특히 고교시절 진로지도가 시작되면서 갈등은 커졌다. 평양의 오빠들, 활동가 아버지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지도’에 시달렸다. 조선대학에 진학하면서 사상교육이 강화됐고, 그는 “형무소 같은 대학”이라고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이켰다.
비틀스 팬인 오빠는 평양서 어찌살까
총련계 청소년들은 참으로 기이한 세상을 산다.
=학교 안에서는 ‘조선 제일’을 배우다, 학교 밖에서는 록 콘서트에 간다. 두 개의 세계가 링크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세계가 링크되는 순간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노래 듣고, 미국 영화 보면서 자란 내가 바깥 세계를 선택한 것은 당연했다. 한편으로 나는 도망칠 세계가 있지만, 오빠들은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비틀스 좋아하고 커피 없이는 못 살던 오빠들이 평양에서 어떻게 지낼까, 실감나게 생각하는 계기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걱정이 들었다. 감독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혹시나 북한의 오빠들을 못 만나지 않을까. 양영희 감독이 말했다. “국적이 남한이든, 일본이든, 북한에 가족이 있으면 갈 수 있다”고. “오래전부터 그랬다”고. 오히려 남한이 조선적 재일동포의 남한 방문에 까다롭다. 그리고 만경봉호는 이산가족을 이어준다. 심지어 핵무기도 그들을 막아선 안 된다. 은 11월23일부터 명동 CQN에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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