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유일주의를 감시하는 사회의 근본적 가치가 흔들리는 절박한 상황…‘밥그릇 타령’으로 오해 말고 ‘인간다운 사회’ 고민하는 교육을 복원하라
▣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인문학 위기론은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거나 인문학 종사자들의 밥그릇이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는 식의 문제의식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 정도의 문제라면 인문학자들이 구태여 학문세계 바깥의 ‘사회’를 향해 위기신호 같은 것을 송출할 필요가 없다.
인문학 위기론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곧바로 사회적 위기이고 사회적 삶의 위기라는 절박한 문제의식이다.
무엇이 게임 산업과 도박을 동일시하게 만들었나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최소한 세 가지 차원에서의 문제적 상황들을 가리킨다. 첫째는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당면한 위기상황이고, 둘째는 대학은 물론 중등교육까지 포함한 공교육 과정에서 인문교육의 부실이 발생시키는 시민교육의 위기이며, 셋째는 사회적으로 인문적 가치의 파탄이 일으키는 막대한 고통과 인간 희생이라는 문제다. 최근에 있었던 이런저런 인문학 위기 선언이나 신호들은 불행히도 훨씬 본질적이고 절실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함으로써 인문학 위기론이 마치 학문의 위기나 학문 종사자들의 밥그릇 타령에만 한정된 ‘그들만의 위기론’인 것 같은 인상을 준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인문적 가치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이다. 어떤 사회도 제멋대로, 함부로, 닥치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살기를 거부하는 사회, 제정신 차리면서 살기로 하는 사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갖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현실적으로는 비록 각종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찢어져 있다 할지라도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라는 답변에 동의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가치들이 바로 ‘인문적 가치’다. 그 인문적 가치의 핵심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 곧 인간의 품위와 생명의 존엄이라는 가치가 놓여 있다.
인문학 위기 선언에 담겨 있는, 혹은 거기 마땅히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사람을 잊어버린 사회, 인간의 품위와 생명 존중의 가치를 변두리로 내몰고 시궁창에 처박는 몰가치 사회를 향해 치달리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이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사회는 시장이 아니며 밀림도 아니다. 시장·산업·경제 등이 제아무리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해도 시장유일주의 원리, 경제제일주의 논리, 시장가치 우선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운영원리·논리·가치가 될 때 사회는 곤두박질하고, 그 가치 전도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고통·희생·비용을 물어야 한다. 이른바 ‘바다이야기’ 사건은 그런 사회적 고통과 희생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게임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산업논리가 우리 사회의 집단사고가 되어 “사행성 게임도 허용하자”로 발전한 것이 도박공화국 사태를 불러온 근본 요인이다. “사람 위에 돈 있다”는 인간 망각의 전도 가치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겪어야 했던 ‘사고공화국’적 고통과 희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경험의 누적 위에서도 인문적 가치의 몰락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떤 의미에서도 제정신 갖고 사는 사회가 아니다.
가치의 망각이 사회의 고통과 희생을 불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시민교육이 ‘인문교육’이다. 인문교육은 인문학 전공자를 길러내기 위한 전문교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문교육은 인문학 전공자도 길러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인간적·시민적 덕목, 가치, 정신자세와 행동원칙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교육이다. 전공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대학 진학자 전원이 일정 기간 인문교육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인문교육의 이런 시민교육적 성격 때문이다. 인문교육은 특정의 직업 분야를 겨냥한 훈련과정 이상의 것이다. 이공·경상·법률·의학 할 것 없이 대학교육의 기본 과정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 인문교육이다. 인문교육은 대학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중등교육 전 과정에 정성스레 도입되어 사람을 사람답게 길러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인문교육이다.
이런 의미의 인문교육이 지금 우리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과정에서 파탄을 겪고 있다는 것도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경제통합적 세계화의 진행, 시장유일주의적 정신상태와 가치관의 팽배, 성장-개발주의 이념의 편만 같은 외적 조건들이 교육의 본질 목적에 심각한 왜곡을 일으키고 있다. 유념할 것은 인문교육이 시장·경제발전·산업 등에 반드시 역행하는 교육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문교육은 반시장·반성장·반산업의 교육이 아니라 시장·개발·산업의 논리들이 사회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다른 모든 논리와 근본가치들을 전면적으로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시장·경제성장·산업을 포함해서 사회 발전 전반을 이끄는 진정한 안내자는 시장유일주의·성장제일주의·산업우선주의가 아니라 비시장·비경제·비산업의 가치들이다. 이 가치들이 죽어버리면 사회는 발전의 지속적 동력을 잃고 시장, 성장, 산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망각한다. 그 망각의 결과는 사회발전이 아니라 인간 희생과 고통의 총량 증대이다. 그뿐인가. 그 고통과 희생을 메우기 위해 사회는 벌어들인 돈의 두 배 세 배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밑지는 장사치고도 이런 장사가 없다. 우리 사회가 그런 식의 밑지는 물장사를 해온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경고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위기 선언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일 것인가.
인문학 위기 선언이 인문학과 인문학 연구자들의 입지가 좁아진 데 대한 불만의 표출인 것처럼 사회에 비친 것은 유감이다. 물론 대학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갈수록 망각되고 학생들의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 대학의 성과주의, 경영주의, 실적계량주의가 인문학자들을 옥죄고 연구비는 모자라고 인문학 계열학과 졸업생들의 취업 전망이 흐리다는 것 등등은 인문학 교수들이 우려하는 사태다. 인문학의 학문적 중요성과 그것의 사회적 중요성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인문적 가치에 대한 치열한 연구는 인문학의 몫이며, 공공의 가치·평화·관용·선의·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한 존중의 능력을 일깨우고 비판정신과 대안적 상상력 등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시민적 덕목을 길러주는 인문교육의 학문적 바탕도 인문학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의 위축은 그 자체로 사회적 위기임이 틀림없다. 문제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얼마나 사회적 관점에서 제시할 줄 아는가, 인문학과 사회의 연결을 위해 연구 성과의 사회적 대중적 소통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인문교육의 시민교육적 효용을 살려내기 위해 얼마나 실천적으로 노력하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기억과 이성과 상상을 계발하자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 인문학계는 반성하고 성찰할 항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이 가진 기억·이성·상상의 능력을 계발하고 종합한다. 성찰·비판·대안상상이 빠진 인문학은 쭉정이 학문에 불과해진다. 대학교육이 어느 때보다도 시민교육적 인문교육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는 지금 인문학자들은 전공 분야에 대한 깊은 연찬을 진행함과 동시에 인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인문학 위기론이 밥그릇 타령으로 비치는 불행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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