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랩도 춤도 끊고 재즈힙합 음반과 영화음악 감독으로 돌아오다… 산전·수전·공중전 뒤 “내가 먼저 즐거운 락(樂) 음악”은 오늘도 전진!</font>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는 데뷔 17년차 뮤지션이다.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뮤지션이 되지 못한 “어린 무지션”이다. 그는 “아직 재즈를 흉내내는 ‘무지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4월 스윙재즈의 흥겨움에 힙합의 그루브를 얹은 재즈힙합 음반 <street jazz in my soul>을 발표했다. 그는 뮤지션 이전에 아이돌 스타였다. 1990년 스무살의 나이로 데뷔해 20대 초반을 아이돌 스타로 살았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힙합 음악을 대중에게 알린 가수로도 평가받는다. 물론 그가 아이돌 스타에서 뮤지션으로 거듭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약’ 문제로 세 번의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20대 중·후반, 시련의 나날을 보내면서 음악적 깊이는 더해졌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뮤지션으로 돌아왔다. 그가 ‘월드컵 가수’는 아니지만 우연히도 월드컵이 열린 2002년 4집 음반 <wild gangster hiphop>, 2006년 5집 <street jazz in my soul>을 발표했다. 뒤집어 말하면, 아이돌 스타의 흥행 강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흥행이 어려운 월드컵에 ‘맞추어’ 음반이 나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는 8월17일 개봉하는 봉만대 감독의 공포영화 의 음악감독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가 끊은 것은 약만이 아니다. 랩도 끊고, 춤도 끊었다. 그는 “나보다 랩 잘하고 춤 잘 추는 후배들 많은데, 내가 잘하는 걸 해서 모범을 보여야지 왜 굳이 못하는 걸 하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음악에 집중한다. 7월26일 서울 강남의 카페에서 영화음악 감독으로 돌아온 뮤지션 현진영을 만났다.
‘맛있는 섹스’로 맺은 봉 감독과의 인연
사실 영화음악 감독 현진영이 아니라 가수 현진영이 먼저였다. 7월의 어느 주말, 채널을 돌리다 그의 노래에 ‘꽂혔다’. 5집 음반 타이틀곡인 (Break Me Down)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어? 정말로 좋은데’라고 생각했다. 그가 뮤지션으로 거듭났다는 소리가 괜한 칭찬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뒤늦게 5집 음반을 찾아 들었다. 그의 노래에서 무언가를 비워낸 자의 가벼운 몸놀림이 느껴졌다. 다시 그의 옛날 음악도 찾아서 들었다. 그가 아이돌 스타 시대에 발표한 1, 2, 3집보다는 음반을 스스로 ‘관장’한 4, 5집에 끌렸다. 그가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에도 그의 음악은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1년생, 3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이제 웬만한 내공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영화음악 감독까지 너끈히 해내고 있다. 의 홈페이지에는 벌써부터 칭찬이 자자하다. 영화의 예고편에 깔린 음악을 듣고 “음악 좋아서 영화가 더욱 기대된다”는 평을 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현진영의 얼굴은 까칠했다. 그는 “한 달째 앉아서 잔다”고 말했다. 누워서 잘 여유도 없다는 것이다. 시사회를 보름 남짓 앞두고 있었지만, 여전히 영화음악 마무리 작업에 바빴다. 를 위해 6개월 동안 공들여 70여 곡을 작곡했지만,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현진영은 “봉만대 감독이 꼼꼼하고 까다롭다”고 말했다. 한 곡을 고르는 데 최소한 서너 곡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놈’의 영화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지만, ‘봉 감독’을 말할 때마다 그의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그에게 봉만대는 “절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라이벌”이다. 현진영과 봉만대는 방송을 하다가 초대손님으로 만났다. 뒤풀이를 하면서 친해졌다. 사실 현진영은 이미 봉 감독의 을 보고 봉 감독에게 ‘꽂힌’ 상태였다. 현진영은 에 대해 “베드신 하나에도 인생사를 담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나 봉만대도 현진영의 팬이었다. 현진영은 “봉 감독이 아르바이트 삼아 찍은 성인영화가 너무 떠서 오히려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들으면서 ‘너도 참 운 없는 놈이구나’ 생각했다”며 웃었다. 현진영의 입장에서 일종의 동병상련이었다.
“아직 논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적 동지가 됐다. 2004년에는 봉만대 감독의 텔레비전 영화 의 음악감독을 현진영이 맡았고, 2006년에는 현진영의 뮤직비디오 <break me down>을 봉만대가 감독했다. 현진영이 “다른 감독의 영화음악을 하려면 봉만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농담을 할 만큼 ‘절친한 만대씨’가 됐다. 정말로 현진영은 봉만대에게 “네 것만 할게”라고, 봉만대는 현진영에게 “너만 쓸게”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을 주고받은 적도 있다.
1990년대 이규형 감독의 영화 이후에 10년 만에 영화음악을 맡았던 은 현진영에게 “나를 공부시킨 영화”다. 을 하면서 다섯 가지 장르영화에 맞는 영화음악을 공부해야 했다. 네 편의 시리즈물인 에는 에로, 스릴러, 공포, 시대극, 코미디 영화의 요소가 골고루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을 위해 100곡 넘게 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그렇게 단련됐다. 하지만 논란도 끝나지 않았다. 봉만대 감독이 만든 <break me down>은 지나친 성적 표현과 부정적인 감옥 묘사를 이유로 공중파 3사에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에게 “이제는 그런 논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더니 “뭐 특이한 놈이라고 하겠죠”라고 간단하게 정리했다. 이렇게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산전, 수전, 공중전’이었다. 이제 웬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는 현진영에게 무엇을 하든 ‘마이 웨이’(My Way)가 있다.
그는 영화음악을 만들 때도 ‘마이 웨이’를 고수한다. 다른 영화음악 감독처럼 시나리오를 열심히 ‘파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보고 또 보고 하지 않는 대신 시나리오 작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죽은 문자 대신에 생생한 이야기가 영화를 더욱 잘 설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자꾸 봐서 줄거리를 의식하게 되면 정작 자신의 음악이 들어갈 부분의 영상에는 몰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은 시나리오에 매달리지 않는 대신에 음악작업을 같이 하는 스태프들에게는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익히도록 한다. 스태프들이 그의 음악이 영화의 틀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조정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는 20여 명의 작곡가들이 소속된 기획사 ‘Made In H.J.Y’의 대표다. 그의 기획사에 소속된 작곡가 후배들이 영화음악 작업을 돕는다. 그래서 의 엔딩 크레딧에는 한국 영화로는 드물게 ‘음악 조감독 최영호’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이렇게 음악감독의 영상 집중과 스태프들의 조절 기능이 시너지 효과를 만든다. 그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믿고 맡긴다”며 “남들이 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틀린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포영화의 공포는 대개 영상과 음악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그만큼 공포영화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성형수술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 도 예외는 아니다. 현진영은 의 음악에 대해 “공포를 확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공포에 젖도록 만들었다”며 “선율마다 공포가 숨어 있다”고 말했다. 에는 음악적 실험도 숨어 있다. 그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에 공포심을 자극하는 선율도 넣어두었다”고 말했다.
감옥에 면회 와서도 “재밌냐”던 아버지
그는 지난해 아버지를 여의는 공포를 겪었다. 그의 아버지도 뮤지션이었다. 재즈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고 허병찬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가 5집 음반을 완성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재즈힙합 음반인 5집은 아버지와 같이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타이틀곡 <break me down>은 48번의 재녹음 끝에 완성했는데, 32번은 아버지가 재녹음을 지시한 것이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음악을 만들지 못하자 아버지는 “그렇게 겪고도 아직도 모르겠냐? 세 배는 겪어야 알겠냐?”라고 질책했다.
그가 ‘사고’를 칠 때마다 “녀석 또 저러네” 하면서 묵묵히 지켜보던, 수감돼 있던 감옥에 면회를 와서도 “재미있냐”고 웃으며 대하던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으로 무언가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는 “행복한 과거가 될 수는 없겠지만,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경험이라고 자위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매를 1시간 맞아본 사람은 매를 맞고 난 다음의 편안함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억압이 공포로 귀환하듯, 그가 겪은 일들은 선율로 귀환한다.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경험이 음악에 반영된다”고 말했다.
그에게 음악은 생활이었다. 어머니는 재즈를 태교음악으로 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팝송이나 재즈를 틀었다. 그에게 트로트는 찾아서 듣지 않으면 좀처럼 듣기 힘든 ‘외국 음악’ 같은 장르였다. 이렇게 한국의 뮤지션은 태어나고 성장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즈와 자신이 선택한 힙합을 결합한 재즈힙합은 오래전부터 현진영 음악 인생의 목적지였다. 그는 “힙합도 결국은 스윙재즈에서 나왔다”고 자신의 음악적 기원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SM’ 출신이다. 그가 스무 살 무렵 를 부르고 ‘현진영 고(Go), 진영 고(Go)’를 외칠 때, 그는 프로듀서 이수만이 키운 가수였다. SM엔터테인먼트는 나중에 설립됐지만, 현진영은 SM 출신 가수의 원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프로듀서 이수만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아직도 SM엔터테인먼트의 가수들은 자신들의 시원을 잊지 않았다는 듯, 현진영의 히트곡 를 이따금 무대에서 부르곤 한다. 한때는 보아와 강타가 불렀고, 요즘은 슈퍼주니어도 부른다. 후배들의 노래는 현진영에 대한 혹은 SM의 시원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그는 SM 시절에 대해 “이수만 선생님은 돈보다 소중한 것을 주었다”고 돌이켰다. 그 시절에 작곡과 프로듀싱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수만 선생에게 작곡과 프로듀싱 배워
아이돌 스타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뮤지션이 됐을 때, 그 많던 팬들은 이미 떠나버렸기 십상이다. 음악은 깊어졌는데 팬들은 적어지는 딜레마다. 현진영도 예외는 아니지만, 현진영의 음악은 오늘도 전진한다. 현진영도 “남들은 현진영이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했다고 여기지만, 스스로는 가졌던 것에 집착하지 않고 가진 것을 소중히 생각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침없이 “나는 즐거울 락(樂)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며 “먼저 내가 즐거운 음악을 한다”고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남들도 좋으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온 현진영은 자신에게 솔직한 ‘마이 웨이’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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