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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괴물, 한국의 자본주의!

등록 2006-07-14 00:00 수정 2020-05-03 04:24

치열한 고투를 벌이며 생존해온 우리네 가족에게 바치는 영화 … 그 다리의 기형성과 흉측하게 벌어진 입은 천민 자본주의를 은유하는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한국에서 가족은 혈연 공동체일 뿐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이다. 한국에서 개인에게 닥치는 위기는 공권력의 보호, 사회적 안전망을 통하기보다는 사적인 안전망을 통해 관리되거나 극복돼왔다. 예컨대 ‘한국은 어떻게 IMF 경제위기를 극복했는가’라는 분석에서 ‘가족의 부조가 부실한 사회적 안전망을 메웠다’는 지적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영웅이 한 명의 슈퍼 히어로나 지역의 시민들이 아니라 소시민 가족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봉준호 감독의 은 한강변에 출현한 괴물에게 아이를 빼앗긴 일가족의 분투를 담고 있다.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박강두(송강호)에게 딸 현서(고아성)는 보물 같은 존재다. 어느 날 한강변에 출현한 괴물에게 현서가 잡혀가자 아빠 강두,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삼촌 남일(박해일), 고모 남주(배두나)는 현서를 찾아나선다. 봉준호 감독은 에 대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괴물과 맞서 싸운 박강두네 가족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절하고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던 우리의 가족들…. 사실 이 영화는 고스란히 그들에게 바치는 영화다”라고 썼다. 감독의 헌사는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로 들린다.

괴수영화의 공식을 거스르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첫 번째 은유를 꼽자면 한강이 아닐까. 한국의 경제 성장은 ‘한강의 기적’으로 은유된다. 집단적인 성공을 뜻하는 한강의 기적을 뒤집어 개인의 역사에 대입하면 ‘한강의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한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맞서 치열한 고투를 벌이며 생존해왔다. 가족은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었고 ‘한 배를 탄 운명’이었지만, 가족은 또한 한강에 뜬 조각배 같은 불안한 운명 공동체였다. 급변하는 사회의 파고가 소시민 가정을 덮치듯, 한강의 괴물은 매점집의 아이를 빼앗아간다. 한국 현대사가 그러했듯, 위기에 처한 가족은 공권력에 구조를 요청하지만 공권력은 가족을 외면하고 오히려 사지로 몰아넣는다. 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현서에게 전화가 오지만 경찰은 현서의 생존을 믿지 않는다. 바이러스 감염자이자 정신질환자로 감금된 강두는 “내 말 좀 끊지 마. 내 말도 말인데”라고 항변하지만, 공허한 반향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제 강두 가족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러해왔듯이, 가족만의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강의 괴물은 한국 자본주의를 은유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듯, 괴물의 탄생 배후에도 미국 아니 미군이 있다. 은 2000년 미군이 한강에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맥팔렌드 사건을 유머러스하게 ‘재현’하면서 시작한다. 2002년 미군이 뿌린 불행의 씨앗은 2006년 한강변에 등장한 괴물이 인명을 살상하는 참사로 이어진다. 미군이 만든 괴물은 미국이 배후인 한국의 자본주의와 공통점을 지녔다. 괴물은 한국의 자본처럼 너무 크지도 완벽하게 유능하지도 않다. 한강의 경사 면에서 미끄러져 구르는 괴물을 보고 있지만, 마치 좌충우돌하는 한국 자본주의를 보는 듯하다. 또 제대로 자라지 못한 다리의 기형성과 다섯 갈래로 흉측하게 벌어진 입의 탐욕은 천민 자본주의의 기형성이나 폭력성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은 괴수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초반부에 괴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할리우드 괴수영화의 공식을 거스른다. 괴물의 때이른 등장은 괴물의 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괴물과 맞서 싸우는 가족의 고투가 영화의 중심이라는 선언이다. 한국적 괴수영화인 에는 보통의 괴수영화처럼 도시 전체를 짓밟는 거대한 괴물도 없다.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위대한 영웅도 없다.

영웅 대신 가족이 있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백수인 삼촌 남일은 현서를 찾아낼 단서를 찾아낸다. 집중력이 좋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양궁 선수인 고모 남주도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틈만 나면 조는 답답한 인간인 강두도 순박한 부성애로 딸을 찾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강두네 가족은 개개인으로는 무능력하거나 결점투성이 인간이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면 가까스로 영웅의 능력에 다가간다. 한국의 가족들은 그렇게 가까스로 위기를 돌파해왔다.

남성의 화염병, 여성의 활…

의 인물도 한국적이다. 세상에 대한 불평은 많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은 부족한 ‘고급 백수’인 남일은 한국 사회운동이 낳은 어떤 인간형을 떠올리게 한다. 여자 양궁 선수인 고모 남주는 야무진 한국 여성상을 대표한다. 남성은 화염병을 던지고, 여성은 활을 쏜다. 공간적 연관성이 전혀 없지만, 이어놓고 보면 한국의 현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엮이기도 한다. 또 이동전화 선진국답게 이동전화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하지만 이런 비유는 때때로 너무 ‘노골적’으로 읽힌다. 비유가 직접적인 만큼 인물의 행동이 예측 가능해 미스터리의 매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도 진폭이 적어서 대중영화로서 흡입력이 떨어진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봉준호 감독은 콘크리트의 감독으로 불릴 만하다. 의 카메라에 잡힌 한강 다리와 하수구의 콘크리트는 도시의 삭막한 내면을 드러낸다. 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던 터널의 이미지는 에서 한강의 하수구로 이어진다. 에서 하수구는 어둠으로 빨려들어 가는 미로의 이미지를 통해 저마다의 미궁을 헤쳐온 한국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물론 에는 봉준호식 유머도 심심찮게 심어져 있고, 한두 마디 금언도 들어 있다. 강두의 아버지 희봉의 한마디, “새끼 잃은 부모 속냄새를 맡아본 적 있어? 부모 속이 한 번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하는 거여”는 기억될 만한 명대사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이 슬픔을 못 이겨 몸부림치는 장면을 부감으로 잡아서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보이게 하는 카메라의 유머도 빛난다. 변희봉, 송강호, 배두나의 연기가 기대대로 빼어나다면, 박해일의 연기는 기대보다 훌륭하다. 박해일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철없는 남자의 역할을 능청스럽게 소화해냈다. 현서 역을 맡은 10대 배우 고아성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하반기 한국 영화 최대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은 7월27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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