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리스 힐튼의 라이벌이 되기 쉽지 않은 예술가 엔터테이너…대중이 볼 일없는 작품으로 끝없이 권위를 창출해야하는 아이러니
▣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혹시 연예인이 되고 싶은가? 그런데 아무리 홍익대와 청담동을 돌아다녀도 어떤 프로듀서나 연예기획사 관계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지금부터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준비해라. S라인 몸매와 얼짱 외모. 그것만 있어도 당신은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다. 외모와 춤이 되면 SBS 에 출연할 수 있고, 인터넷에서 섹시한 춤이나 얼굴로 화제가 되면 SBS 와 문화방송 의 ‘검색 대왕’에 출연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인상적인 모습만 보여준다면 당신은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할 수도 있고, 인터넷 언론은 바로 그 소식을 다룰 것이다. 그 다음? 아마도 당신은 모바일 화보업체로부터 촬영 제의를 받을 것이고, 모바일 화보업체는 정식으로 보도자료를 돌릴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거리에서 춤추는 모습이 찍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떨녀’는 이 코스를 그대로 밟아 한국방송 에도 출연했고, 에서 연 4억원을 번다고 해 화제가 된 ‘4억 소녀’와 에서 단백질 인형 같은 사진으로 출연한 ‘단백질 소녀’도 모바일 화보를 찍었다. 물론 이들이 아직 스타가 되진 못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요소만 더 갖춰지면 진짜 스타가 될 수도 있다.
캐릭터가 컨텐츠보다 먼저인 대중문화
현영을 보라. 현영이 처음에 연예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S라인 몸매를 자랑하는 각종 화보 사진과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었다. 그는 연예인이었지만 연기자도, 가수도 아니었다. 다만 텔레비전에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현영의 캐릭터가 점차 인기를 얻자 그는 그 캐릭터 그대로 드라마에 출연하고, 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콘텐츠에서 캐릭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그 캐릭터가 되기 위한 어떤 ‘자산’을 가지고 있느냐가 연예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연기와 노래, 뛰어난 말솜씨 같은 전문 분야의 능력은 그중 가장 가지기 어려운 축에 속하는 것일 뿐, 필수 요소는 아니다. 자신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어떤 자산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유명해질 수 있다. 요즘 슈퍼주니어 같은 아이돌 그룹이 가수로 데뷔했으면서도 각자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눈길을 끌어 캐릭터를 만들어야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낸시 랭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자산을 가진 ‘연예인’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그가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진 예술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낸시 랭의 이력이 시작된 베니스 비엔날레의 퍼포먼스는 초청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자의적으로 벌인 것이었고, 그의 작품이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근 인터넷에는 그의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연예인으로서의 낸시 랭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낸시 랭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질 수 있었지만, 정작 대중이 그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작품보다는 ‘메가패스’ CF나 m.net의 같은 프로그램을 훨씬 많이 봤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건 그가 기존 예술가의 이미지를 벗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다. 앤디 워홀이 무색하게도, 한국에서 현대미술가는 대중에게 머나먼 존재다. 특히 행위예술은 여전히 ‘전위’라는 말과 통한다. 낸시 랭은 그것들을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접점을 만들어 예술가라는 자산을 가치 있게 이용한다. 그가 종종 벌이는 퍼포먼스는 실제로 그것을 본 사람이 얼마 없거나, 그 완성도가 떨어진다 해도 대중의 관심에 좌우되는 매체의 선택을 받을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거리에서, 각종 행사장에서 노출하고, 비욘세의 <crazy in love>를 틀고 자신을 추종하는 ‘리틀 낸시’와 함께 홍대 거리에서 춤을 춘다. 게다가 그는 명품을 찬양하고, 예쁜 옷과 가구를 사랑한다. 즉, 그의 예술행위들에는 포장은 예술이지만 내용물은 사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대중이 좋아하는 소비행위와 대중이 보길 원하는 엔터테인먼트가 낸시 랭을 통해 더욱 고급스러운 의미로 거듭난다.
비엔날레와 의류업체가 주는 신빙성?
그가 진행하는 에서는 연상녀-연하남 커플의 애정행각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이 전부일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낸시 랭은 인터뷰 등에 담긴 의미를 짚어내거나, 그것을 재료로 어떤 예술적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런 커플을 이루는 남자를 ‘Boy Toy’라고 명명할 뿐이다.
그러면 그게 낸시 랭이란 예술가가 말하는 ‘트렌드’가 된다. 또 연예인이 입는 옷에 관한 이야기도 낸시 랭이 쓰면 꽤나 ‘있어 보이는’ 문화 칼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낸시 랭이 예술가의 타이틀을 통해 뻔하고 속물적인 어떤 대중문화들에 ‘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덧칠하면서 스스로 대중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엔터테이너가 되려 한다는 사실이다. 낸시 랭이 예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예술가 낸시 랭이 하는 것이 ‘예술’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낸시 랭의 비교대상은 앤디 워홀이 아니라 그가 라이벌이라고 밝힌 패리스 힐튼이다.
패리스 힐튼은 전문적인 연예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지만, 현재 미국에서 그 누구보다 유명한 인물이다. 호텔 재벌 힐튼가의 자식인 그는 대중이 바라는 억만장자의 모든 이미지를 충족시켜준다. 그는 대중 앞에서 아낌없이 벗고, 망가지고, 놀면서 대중의 부자에 대한 열등감과 호기심을 모두 해소해준다. 대중은 그가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 부자도 별거 없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드러나는 부유층의 사생활을 통해 그들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킨다. 그는 자신의 자산을 정확하게 엔터테인먼트적 가치로 환산하는 능력을 가졌다. 만약 낸시 랭이 패리스 힐튼처럼 될 수 있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자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패리스 힐튼과 낸시 랭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을 부를 가진 패리스 힐튼은 그것을 자산가치 삼아 그의 삶 자체를 엔터테인먼트화했다. 실제로 그를 확실히 스타덤에 올린 리얼리티쇼 는 그의 사생활에서 오는 이미지를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라는 자산을 가진 낸시 랭은 계속 예술 관련 콘텐츠를 발표해야 하고, 그것이 예술계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예술가의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갔다는 사실, 그리고 한 의류업체의 디자이너로 발탁됐다는 사실이 그가 말하는 ‘트렌드’라는 것의 신빙성을 더한다. 실제로 대중이 그가 발표한 작품을 전혀 보지 못하더라도, 그는 계속 예술작품을 만들어내야 텔레비전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현재 한국 대중문화계의 독특한 상황을 보여준다.
예술가 이미지마저 뒤엎을 순 없나
만약 낸시 랭이 정말 예술가의 자산을 가진 채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생산하고 싶었다면, 그는 자신의 삶 자체로 예술가의 이미지를 뒤엎는 엔터테인먼트를 보여줬어야 한다. 명품을 사는 걸 좋아하고, 자신이 속물적인 사람임을 숨기지 않는 그는 예술의 의미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그가 벌이는 모든 해프닝이 고상한 예술가에 대한 대중의 은근한 반감을 자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명품 핸드백을 사고서 “명품 핸드백을 사는 것은 최고의 예술행위”라며 아무 생각 없는 듯이 웃고 있는 낸시 랭을 생각해보라.
그게 바로 풍자고 엔터테인먼트 아니겠는가. 하지만 낸시 랭이나 그의 예술행위를 두고 진짜니 사기니 하는 평가를 내리는 대중이나 누군가 콘텐츠를 만들지 않고도, 혹은 그 창작행위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가 된다는 사실은 부정한다. 심지어 S라인 몸매와 얼짱, 심지어는 4억원을 번다는 사실마저도 연예인 데뷔의 수단이 되는 이 시점에도 말이다. 그래서 낸시 랭의 앞으로의 행보는 한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가 지금의 방향을 고수하는 한, 낸시 랭은 서울대 중퇴에 사업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투자를 받아 화제가 됐다가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유밀레처럼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는 객관적인 팩트나 평가가 존재하기 어려운 예술적 능력이 자산이기에 유밀레보다는 나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유명세에 어울리는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예술가 낸시 랭뿐만 아니라 연예인 낸시 랭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그가 자신이 가진 예술가의 이미지를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제대로 쓸 수 있다면 그는 작품활동과 별개로 대중이 가지고 있는 예술가에 대한 욕망들을 충실히 채워주고, 패리스 힐튼이 자신의 부유함으로 엔터테인먼트를 보여줬듯 예술가라는 직업만으로도 엔터테인먼트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낸시 랭이 좋은 예술가인지는 알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중은 이런 것들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다만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다. 요즘처럼 무엇이든 재밌으면 연예계로 끌어들이는 때는 더욱 그렇다. 누구도 그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예술이건 엔터테인먼트건 ‘있는 척’하는 사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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