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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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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을 팔았던 기자

등록 2006-06-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실존 논픽션 작가 트루먼 카포티의 캔자스 취재기 … 예민한 재능으로 진술과 명예를 좇은 그에게 돌 던질 수 있을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목소리가 기묘한 남자가 있다. 누가 들어도 성정체성을 의심할 만한 목소리다. 스스로 “말투가 이상해서 편견에 둘러싸여 성장했다”고 말하는 그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읽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이용하는 방법도 터득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늘은 그에게 들은 말의 94%를 기억하는 비범한 기억력을 선사했다. 비범한 기억력 못지않은 탁월한 묘사력까지 겸비했으니 달변에 달필이다. 작가이자 기자인 그는 교활하다면 교활하고, 영리하다면 영리하다.

취재를 위해서는 기발한 입담으로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를 주저하지 않고, 권력자에게 뇌물을 건네기도 서슴지 않으며, 취재원의 아픈 곳을 건드려 내밀한 고백을 끌어내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의 주인공 트루먼 카포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그런 사람이다. 는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실존인물 트루먼 카포티를 다룬 영화다.

금광 같은 취재원의 사형 집행을 유예시키고

그에게 희대의 특종을 할 기회가 생긴다. 어느 날 신문을 보던 카포티는 1959년 11월 미국 캔자스주의 작은 마을에서 가족 4명이 몰살됐다는 기사를 읽는다. 그는 무언가 대단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냄새’를 맡고, 당장 캔자스로 달려가 추적에 나선다. 먼저 카포티는 작가적 명성과 재담꾼의 재능을 최대한 이용해 사건 수사관 부인의 환심을 사고, 부인의 호감을 다리 삼아 수사관마저 ‘녹여서’ 살인범과 일대일 대면에 성공한다. 일가족을 몰살한 두 명의 살인범 중에서 살인범답지 않은 예민한 인상의 페리 스미스(클리프턴 콜린스 주니어)가 카포티의 눈에 들어온다. 카포티는 스미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스미스의 예술적 재능까지 감지한다. 그리하여 “고독과 공포에 휩싸인” 스미스에게 매혹된다. 카포티는 스미스에게 매혹되지만, 한편으로 스미스는 카포티에게 “금광”이다. 자신의 걸작을 만들어줄 금광 같은 취재원이다. 캔자스 지방법원이 살인범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순간, 스미스보다 카포티가 더욱 동요한다. 그는 “그들을 살리고 싶다”고 말하고, 실제 그들에게 제대로 된 변호사를 소개해서 사형집행을 유예시킨다. 이것도 순수한 동기만은 아니다. 스미스는 카포티를 위해서도, 카포티의 작품을 위해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 아직 카포티의 작품을 위한 스미스의 진술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포티는 스미스에게 “세상이 당신을 괴물로 알 텐데, 나는 그러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카포티의 말은 진심이지만, 진심 너머의 진실도 있다. 스미스가 괴물이 아니라 상처받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은 스미스를 구원하기도 하지만, 카포티의 명성을 높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사형집행이 유예되면서 스미스의 결정적 진술도 유예된다. 이미 스미스의 성장사를 세밀하게 인터뷰한 카포티에게 이제 필요한 진술은 그날의 살인현장에 대한 스미스의 진술이다. 왜 이토록 섬세한 사나이가 그렇게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는지가 논픽션 소설에 결정적 장면이 되기 때문이다. 카포티는 스미스의 마지막 진술을 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불행한 성장사를 드러내고, 스미스 누나의 마음을 거짓으로 전하기도 한다. 카포티가 스미스와 다르지 않은 불행한 유년시절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야기할 때,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인지 스미스의 진술을 끌어내기 위한 제스처인지 역시 모호하다. 어쩌면 제스처로 오해받는 진심, 진심을 위장한 제스처, 두 가지 모두가 정답이다. 실제 스미스는 카포티와 유년의 고통을 공유한다. 그것이 카포티가 스미스에게 매혹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포티에게 스미스는 자신의 거울이자 취재의 대상이다. 더구나 카포티는 스미스에게 사랑과 우정 사이의 모호한 감정으로 어쨌든 매혹돼 있다. 매혹당하면서 이용해야 하는 복잡한 ‘시추에이션’에 빠진 것이다. 카포티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느낌이야. 페리와 나는 한집에서 자라다가 어느 날 그는 뒷문으로 나가고 나는 앞문으로 나간 것이라는.”

사형이 필요하다! 딜레마에 도달한 작품

시간이 흐르면서 카포티의 딜레마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1년, 3년, 5년이 지나도 스미스의 사형집행은 유예된다. 여전히 카포티를 위해서 스미스는 살아 있어야 하지만, 이제 카포티의 작품을 위해서는 스미스의 사형집행이 필요하다. 그래야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카포티에게 이런 상황은 “고문”으로 느껴지지만, 스미스는 유일한 구원자인 카포티에게 갈수록 매달린다. 불안한 스미스는 자꾸만 묻는다. 카포티에게 “당신 책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스미스에게 책 제목은 의문스러운 카포티의 진심을 요약한 문장으로 여겨진다. 카포티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회피한다. 하지만 카포티는 이미 제목을 (In cold blood)으로 정했다(실제 1965년 출간된 은 논픽션 소설의 장르를 개척한 작품으로 5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카포티의 마음도 흔들린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로 2006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호프먼의 연기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스미스 역의 클리프턴 콜린스 주니어도 우울한 얼굴에 깃든 애절한 눈빛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어쩌면 기자란, (논픽션) 작가란, 때때로 타인의 상처를 팔아서 자신의 밥벌이를 하는 직업인지도 모른다. 어디 기자뿐이랴. 는 상처로 담금질한 예민한 재능을 무기 삼아 자신의 명예를 좇는 인간 군상의 비애에 관한 이야기다. 카포티를 욕할 수는 있지만, 카포티에게 돌을 던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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