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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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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 스란치마가 소곤댄다

등록 2006-05-18 00:00 수정 2020-05-03 04:24

출토복식 특별전이 보여주는 수백년간의 유행과 알뜰한 미감…소매 끝에 남겨진 까만 얼룩과 때조차 독특한 역사여행 안내서

▣ 조희진 복식 칼럼니스트 chamccot@naver.com

‘450년 만의 외출’ ‘무한지애(無限之愛) 1614’ ‘오백년의 침묵, 그리고 환생’ ‘금선단치마 입고 어디 다녀오셨을까’…. 사연 많은 역사 속 인물을 다룬 영화 제목 같기도 하고, 애틋한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죽은 연인들이 등장하는 소설의 한 대목인 듯도 한 이 짧은 문구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답은 최근 몇 년 동안 국내 유수의 박물관에서 열린 출토복식 특별전 제목이라는 것. 감성을 자극하는 문구로 표현된 이 전시에 등장한 유물들은 모두 조선시대 무덤에서 묘주(墓主)인 미라와 함께 몇백 년 뒤의 세상 속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무덤에서 나온 옷가지와 소품이라는 뜻에서 ‘출토복식’이라 불린다.

평소 입던 옷으로 그대로 염습

무덤 속 작은 공간인 관(棺)에서 몇백 년 전의 복식이 건재한 상태로 발견되는 것은 그 무덤의 주인 역시 육탈(肉脫·주검이 썩어 뼈만 남는 것)하지 못한 미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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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라라고 하면 붕대 칭칭 감은 이집트의 그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리나라에서 발굴되는 미라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른 조선시대 무덤의 특수한 조성 방법 때문에 부패가 지연 혹은 정지된 데서 기인한다.

깊이 판 광중(壙中)에 관만 묻는 요즘의 매장법과 달리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조성한 무덤은 외관(外棺)과 내관(內棺)이 따로 마련돼 이중구조를 이룬다. 흙을 덮기 전 석회와 황토, 고운 모래와 찹쌀 죽을 섞어 만든 회곽(灰槨)을 얹었는데, 이것이 시멘트처럼 굳으면서 외부 공기와 수분의 침투가 차단되고, 무덤의 깊이로 인해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 속 환경 때문에 반쯤 건조된 듯 보이는 미라의 피부를 제외하고 작은 속눈썹과 주름, 머리카락, 치아, 손톱과 발톱까지 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 남게 된다. 미라의 상태가 좋을 경우, 옷과 보공품(補空品·시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틈새를 메우기 위해 넣은 옷가지와 물품)을 손상 없이 수습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무덤이 열리고 미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역사의 흐름에 파묻혀 박제로 남았던 삶의 면면을 생생한 개별 사례로 확인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998년 안동 정상동에서 발굴된 이응태(1556~86)의 관 안에 남편의 요절을 안타까워하는 아내의 편지와 머리카락 섞인 미투리가 온전히 남아 있어 400여 년 전의 애틋한 부부지정이 세상에 알려졌고, 2001년 경기 양주에서 발굴된 17세기의 소년 미라는 어린이 매장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례로 꼽힌다. 이렇듯 미라가 발견되는 무덤이 중요한 이유는 당대의 매장 방법과 염습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실물 자료이며, 풍부한 시대성을 담보하고 있어서 문헌 기록과 당대 실생활 사이의 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지표로써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어머니가 지어준 옷으로 염습하라.”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고 황희(1363~1452)와 더불어 청백리로 이름을 높였던 허조(1369~1439)는 평소 자신이 입던 옷을 습의(襲衣·오늘날의 수의)로 사용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은 그의 소박한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출토복식의 정체를 밝혀주는 명쾌한 표현으로도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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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복식은 망자를 위한 수의이며, 수의이기 이전에 일상복이었다. 언제부턴가 염습용 수의를 따로 마련하는 풍습이 생겨났지만, 조선시대에는 허조의 유언처럼 마지막 가는 길에 평소 입던 옷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출토복식에는 일상복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저고리 동정과 소매 끝에 남아 있는 까만 얼룩과 때, 군데군데 해진 부분을 수선한 자국이며 꼼꼼하고 알뜰하게 자투리 천을 이어붙인 안감이 그것이다. 일상복이었던 덕분에 자료적 가치는 오히려 높다. 만든 사람의 바느질 솜씨는 물론 당대에 널리 유행했을 법한 여러 가지 옷감과 문양, 형태 그리고 입은 사람의 취향과 경제적 여건, 알뜰함과 실생활에의 응용력까지 세세하게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79년 5월 경기도 시흥에서 출토된 청주 한씨의 스란치마는 연꽃 문양이 가득한 비단 바탕에 금실로 포도와 동자 문양을 넣은 스란단을 통해 이미 16세기 복식의 화려함과 미감(美感)을 선보인 바 있다.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양 홍씨 부인의 치마는 의례용이라는 목적에 걸맞게 뒷자락을 우아하게 늘어뜨린 형태로 엉덩이와 허리 뒷부분을 강조한 서양의 버슬(bustle) 스타일 치마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행여 걸을 때 방해가 될까 저어했던 듯 치마 앞에 덧주름을 잡아 장식성과 실용성을 살린 지혜 또한 매력적이다.

감탄스러운 임산복의 변용 미학

1980년, 남양 홍씨 홍계강(16세기 추정)의 묘에서는 1.5~2mm 간격으로 고르게 주름을 잡은 남성의 포(袍) 철릭이 출토됐는데, 흉내낼 수 없는 섬세한 바느질이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출산 중 사망했으며 복중에 태아가 있는 것으로 판명돼 세상을 놀라게 한 파평 윤씨 모자(母子) 미라 곁에서는 평면으로 재단된 저고리 양옆을 서양식 다트처럼 꿰매, 임산부의 부른 배를 감싸안을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변형한 저고리 두 점이 발견됐는데, 이는 생활 속에서 이뤄진 소박한 변용의 미학을 보여주는 예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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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복식의 가치를 인정하고 새로운 연구 분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최근, ‘다시 태어난 우리 옷 환생’이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출토복식 특별전이 열렸다. 국내 최고의 출토복식 메카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의 공동 주최로 열린 이 특별전에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출토복식 중 가장 특징적이고 아름다운 유물이 선별 전시돼 관심을 끈다.

미라가 입었던 옷, 무덤에서 나온 옷이라는 극단적 출신성분을 감안해도 출토복식이 가진 매력은 자못 남다르다. 몇백 년 동안 아무런 굴곡 없이 이어졌을 것만 같은 우리 옷이 실은 줄곧 유행 곡선을 따라 움직였고, 때로 당대의 성리학적 이념과 치열하게 투쟁하며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출토복식은 최근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사극 열풍 속에서, 극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복식 고증의 뚜렷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 옷이 가진 우아함과 세련됨, 독창적인 디자인 감각과 솜씨, 다양성을 확인시켜주는 흥미로운 표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무덤과 미라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출토복식과 각종 부장품의 진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춘다면 더없이 훌륭한, 그리고 아주 독특한 ‘역사여행 안내서’를 손에 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시적인 역사의 보편성과 미시적인 삶의 다양성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그런 안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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