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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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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그 위대한 내공

등록 2006-03-18 00:00 수정 2020-05-03 04:24

카우보이 멜로극 <브로큰백 마운틴> 만든 대만계 할리우드 감독
미국적이되 미국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서구사회 섬세한 되새김질

▣ 심영섭 영화평론가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1963년 와이오밍, 에니스 델마와 잭 트위스트 두 카우보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한여름을 보낸다. 양떼를 치고, 사슴을 사냥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위 때문에 우연히 함께한 텐트에서 격정에 못 이겨 서로의 살을 섞고. 그리하여 그들은 평생 그리워하지만 다시는 갈 수 없는 곳, 브로크백 마운틴을 가슴에 묻는다. 인습의 밖에 놓인 사랑의 구심력에 평생 끌려다닐 줄 모르고, 그것이 질긴 사랑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그들은 그리워한다. 그것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산인지, 서로의 육체인지, 그 짧은 여름 모든 것이 함께했던 잃어버린 낙원인지, 알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둘은 헤어질 수도 없다.

뉴욕의 백수시절, 38살 첫 작품 <쿵후선생>

지난 3월6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리안 감독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고전주의적 서부극에 동성애를 차용해, 신화화된 땅 서부와 미국을 되새김질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한다. 서부극의 원형이 카우보이로 대표되는 미국을 상징하는 강하고 자유로운 떠돌이 영웅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것이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서부 사나이들을 억압하고 스스로의 본질에서 소외시킨다는 것을 은연중에 폭로한다. 기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서부극에서 으레 나오는 기차라는 기호가 없는 공간이다. 대신 그곳은 양떼와 사슴이 뛰놀고 자신의 본능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는 낙원 혹은 천상의 이미지로 더욱더 현실과 거리를 벌인다. 생각해보라. 에니스와 잭은 상징적으로 불을 피우는 것을 금지당한다. 그들은 무화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를 어긴 에덴동산의 인간처럼 불을 피우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성차의 경계를 넘어 육체적 접촉을 시도한다. 이 파격의 멜로·서부극을 만든 이. 혹은 게이 서부극을 만든 이. 미국에 관한 비판과 사랑과 초월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절창이라면, <와호장룡>이 무협의 역사를 다시 썼다면, 그 뒤에는 대만 출신의 할리우드 감독 리안의 심후한 내공이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1954년생인 리안은 결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한다. 대만에서 대학 입시에 실패해 미국으로 유학한 뒤, 6년이나 뉴욕에 머물면서 별다른 직업 없이 백수 생활도 했다. 그러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사인 중앙전영공사 주최 시나리오 공모에서 <추수>로 당선돼 데뷔작 <쿵후 선생>을 만든 것이 38살. 나이 마흔에 감독 데뷔를 한 이창동 감독처럼, 리안도 정말로 대기만성형의 인간에 속한다.

사실 처음부터 리안이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리안이 감독 데뷔를 할 무렵 대만에는 이미 허우샤오셴이나 에드워드 양 같은 걸출한, 아니 위대한 감독들이 대만 뉴웨이브를 이끄는 중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유장한 롱테이크의 호흡을 중요시 여겼던 대만 뉴웨이브의 감독들과 달리 중산층 사람들을 소재로 해체되는 전통적 가족 구조를 다룰 때도 대중이 가장 쉽게 소화할 수 있는 경쾌한 희극풍을 선택했다. 데뷔작 <쿵후 선생>은 뉴욕을 무대로 백인 며느리와 대만인 시아버지 그리고 대만 화교들의 갈등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

동성애자인 대만 출신의 미국 유학생이 부모의 강권으로 결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결혼피로연>(The Wedding Banquet)(1994)은 베를린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기도 했다. 1994년에 만든 세 번째 영화 <음식남녀>는 음식을 매개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딸과 중국의 전통음식을 고수하는 전통 요리 달인의 관계를 절묘하게 그려냈는데, 흔히 ‘아버지 삼부작’이라 불리는 그의 초기 대만 영화들은 개인과 가족, 현대와 전통, 서양과 동양의 대립이 한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유머러스하고 리드미컬하게 묘사했다.

결국 <음식남녀> 이후 리안은 할리우드로 진출하게 된다. 할리우드는 리안이 쓰는 각본과 연출시 보여주는 드라마의 구성 능력을 높이 샀던 것. 그러나 그의 첫 시험무대는 뜻밖에도 19세기 영국을 무대로 한 시대극 <센스, 센서빌리티>였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밀고 당기는 영국 귀족의 연애담을 담은 시대극에서 리안은 서양인들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완벽한 서양 영화를 솜씨 좋게 만들어 내놨다. 이 작품 역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다시 한 번 받았고, 동양 출신 감독인 리안이 서양적 화법에도 능하다는 것을 전세계에 각인시켰다(이 점에서 그는 일본의 명장 구로사와 아카라와 매우 비슷하다). 이 시기를 넘어 정확히 1990년대 중반부터 리안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표적을 겨누는 배짱도 더욱 두둑해진 것이다.

스와핑 다룬 <아이스 스톰>, 중산층 응시

개인적으로 리안의 최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1994년 영화 <아이스 스톰>은 1970년대 미국의 부부를 맞바꾸는 스와핑을 소재로, 해체되는 미국의 도덕과 가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얼음과 눈의 이미지는 바로 삭막한 미국의 중산층을 응시하는 리안의 냉정한 시선인 동시에 살얼음판처럼 깨지기 쉬운 미국의 도덕성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1999년에 내놓은 작품 <라이드 위드 데블>은 남북전쟁이 발발한 186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가족처럼 지내던 마을이 갈가리 분열되고 반목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전쟁의 가혹함을 경험하는 청년 제이크의 시선은 바로 미국의 주류 사회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할 줄 아는 리안의 심리적 거리감이기도 했다.

이렇게 깊이 드리워진 가족의 그늘 밑에서 성장하는 이안의 주인공들은 늘 체제와 주류의 편견에 비껴나 있는 심중 깊은 무사들이기도 했다. 리안의 주인공들은 남북전쟁이나 영국의 귀족 사회 혹은 현대 미국의 이성애 사회 같은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늘 담담히 자신의 길을 가는 특징이 있다. 특히 <아이스 스톰> <라이드 위드 데블> <와호장룡>은 그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성장담 영화로도 읽혀진다. 가족과 인간을 같이 담아내는 데 더없이 좋은 구도가 그에겐 성장담을 담아내는 것이고, 이 가운데 빚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을 리안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앞서 있는 그대로 수묵화 그리듯 담담히 보여주는 쪽을 택한다. 어쩌면 리안의 영화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시간의 부식과 쓸쓸한 비애의 그림자가 묻어나는 쪽은 오히려 아버지 세대다. <와호장룡>에서 구전 자음침에 죽어가는 절세 검객 리무바이나, 공항의 검색대에서 손을 번쩍 들어 항복하는 자세로 미국을 떠나는 <결혼 피로연>의 아버지의 뒷모습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점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마찬가지다. 20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사랑했음을 깨달은 한 카우보이는 이혼 뒤 간간이 보아온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띄엄띄엄 묻는다. “그를 사랑하니?” 사랑을 너무 늦게 품게 된 사내가 성인이 되어 또다시 가혹한 노동의 조건과 부풀려진 가정이란 외양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르는 자식에게 본질에 대해서 물어본다. 이러한 장면이야말로 지극히 리안적인, 가족이란 에덴의 동쪽 뜰 안에서 바라보는 쓸쓸한 미국이란 나라의 초상화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현실의 무게가 거셀수록 리안의 영화 세상에는 늘 현실을 탈출하는, 영화에는 존재하지만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장소가 등장하게 된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주인공 용(장쯔이)이 몸을 던지는 무의 안개 바다나 연인과 몸싸움을 하며 서로의 육체를 터득해나간 고비사막은 베이징이란 억압과 관습의 족쇄를 벗어난 신화화된 공간이었다. 흥미롭게도 <와호장룡>에서 선보였던 도시-사막-원시림의 구도는 리안이 만든 단 하나의 블록버스터 <헐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헐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아리조나사막에서 미국 정부와 대립하며 팽창하는 스카이 콩콩의 본능으로 사막을 횡단한다. 이 신화적 공간에서, 아버지의 법을 비켜난 상상계에서, 리안의 주인공들은 아니 어쩌면 미국은 나쁜 인디언 대신, 슈퍼맨류의 영웅 대신, 마침내 더욱더 사나워진 자신의 이드와 대면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부단히 성찰한다

이렇게 리안은 부단히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오고 갔다. <센스, 센서빌리티>에서 서양적인 것을 서양적으로 구현했고, <와호장룡>에서 동양적인 것을 동양적인 것으로 구현했으며, <헐크>에 와서 서양적인 것을 동양적으로 구현했다. 비록 <헐크>는 미국 내에서 많은 비판을 들었지만, 이제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르면 리안은 가장 원형적인 사랑의 이야기로 그 모든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결국 잭은 우연한 사고로 죽고, 에니스는 이 천형의 세상에 혼자 남게 된다. 결혼은 부서진 돛대처럼 에니스의 삶을 파산 상태로 몰고 가고, 그는 이제 초라한 트레일러에 몸을 의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 가운데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을 움직일 수도 설득할 수도 없는 가장 초라한 자일지라도 신은 우리에게 사랑의 기억이란 마지막 선물을 허락했다는 것을. 영화의 마지막, 에니스는 잭의 친가를 방문해 그가 20여년 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몰래 가져간 자신의 셔츠를 발견하게 된다. 옷장 문을 열자 그곳엔 자신의 옷과 에니스의 옷이 나란히 한 사람의 옷처럼 포개져 있었던 것.

에니스는 그 셔츠를 가슴에 품고 중얼거린다. “I swear….”(맹세할게) 무엇을 맹세하는지 알 길 없지만 목적어가 없는 이 대사의 여운은 웨스턴의 공식을 뒤집어 멜로의 스토리를 심어놓고 미국, 그 쓸쓸한 초상화를 초월적 경지에 이르게 하는 투명한 사무침이 마음을 쓸어내린다. ‘낙원에서 보낸 한철’을 뒤로하고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된, 신에게 추방된 우리의 원형적인 모습이 어른거린다.

동도 서도 될 수 없는 이방인의 눈으로 서구의 역사를 명상하는 감독 리안. 그는 심중 깊은 영화의 달인이자, 상업영화의 틀 내에서 부단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보기 드문 감독임이 틀림없다. 은근한 행간의 여백을 벗 삼아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깊이를 표면으로 지그시 응시하는 무사 리안은 이번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이제 ‘좋은 영화’가 아니라 ‘위대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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