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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시장, 홈쇼핑이 주무른다

등록 2006-03-18 00:00 수정 2020-05-03 04:24

논술 수요 노린 대형출판사의 시리즈물, 한시간 방송에 5억매출
터무니없는 공급가로 정가시장 혼란, 인문학 출판사 양극화도 심화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논술 관련 책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민음사의 자회사인 민음IN은 올 초부터 대형 기획물 ‘민음 바칼로레아’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64~84쪽 분량의 포켓용 소책자다. “100년 전통, 세계 최고의 논술시험인 바칼로레아 수험생을 위해 프랑스 과학계의 석학들이 쓴 과학 논술 시리즈”로 홍보된다. 1차분 과학편 10권을 시작으로 현재 17권까지 나온 이 시리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언어, 예술 영역까지 망라할 계획이다. 생각의나무도 동일한 타깃의 통합형 논술 대비 과학 시리즈 ‘유레카 시리즈’ 10권을 1월 말 출간했다.

“죽어버린 인문서, 논술용으로 다듬어라”

김영사가 3월 말, 4월 초를 목표로 마무리가 한창인 ‘지식인 마을’도 콘셉트가 동일한 대형 기획물이다. 국내의 분야 전문가들이 집필에 대거 참여했고 철학을 이슈 중심으로 풀어낸다. 김영사의 신은영 실장은 “통합논술 정책이 만들어졌지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독서 프로그램이 미비하고 교육 현장에서 혼돈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실사를 바탕으로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난해에도 ‘논술’은 단행본의 키워드였다. 예스24의 최성혜씨는 “원래 수능·논술 관련 책을 내는 출판사는 몇 개로 정해져 있었는데, 지난해 이 시장에 단행본 출판사들이 뛰어들면서 다채로워졌다”고 말한다. <철학 통조림-매콤한 맛> <…달콤한 맛>(주니어김영사), <생각발전소>(북로드), <명작 속에 숨어 있는 논술>, <교과서 속에 숨어 있는 논술>(살림) 등은 최근에 나온 단권이나 1, 2권의 작은 분권 체재를 갖춘 논술 관련 서적들. 지난해에 시작된 시리즈도 많다. 글담의 ‘선생님도 모르는 이야기 시리즈’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 시리즈’, 서해문집의 ‘책상 위의 교양 시리즈’, 풀빛의 ‘철학창고 시리즈’, 웅진지식하우스의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시리즈’, 휴머니스트의 ‘살아 있는 교과서 시리즈’ 등.

대형 기획 시리즈들은 모두 간편한 포켓북 형식으로 30~40권이 넘는 낱권이 모인다(주니어김영사의 ‘앗! 시리즈’를 연상하면 된다). 기존의 자료를 활용하여 ‘논술 시리즈’가 완성되기도 한다. 생각의나무 ‘유레카 시리즈’는 이전에 출간된 <사이언스 퍼스트> <유레카>를 원본으로 한다. 여기에 그림을 덧붙이고, 문장을 강조하고, 인물 소개 등의 팁과 주가 들어가고 10권으로 늘였다. 곧 출간될 논술 시리즈를 진행한 출판사의 모 부장도 비슷한 고민 끝에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좋은 인문서를 계약했다. 하지만 진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죽어버린 인문서 시장에서 이 책이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논술용으로 다듬어 편집을 다시 했다. 그리고 얇게 여러 권으로 분권했다.”

이런 시리즈는 세트 판매가 많다. 예전의 포켓북인 ‘하룻밤의 지식여행’이나 ‘앗! 시리즈’와 달리 시리즈의 각 권이 교과 과정의 부분을 형성하기 때문에, 교과 과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세트 전체가 필요하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낱권보다 세트 판매가 많았으며 300세트 가까이 팔렸다(3월8일까지 집계).

역사도 한물가고, 위인도 안되고…

이런 ‘시리즈 구성’의 강박은 청소년 논술시장 유통경로의 강자로 떠오른 홈쇼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송만 되면 매출은 ‘장난이 아니다’. GS홈쇼핑의 ㄱ과장은 평균 1회(1시간) 방송에 5억원이 팔린다고 말한다. 실제로 홈쇼핑에서 도서를 판매해본 출판사의 영업차장은 2억~3억원 수준이었다고 말한다.

홈쇼핑에서 도서는 ‘한경희 스팀 청소기’만큼 인기가 좋다. GS홈쇼핑에서 2월8일∼3월8일에 방송된 도서 중, 여러 인문학 출판사가 세트를 구성했던 단 1회를 제외하고 모두 ‘매진’을 기록했다(홈쇼핑에서 매진이 흔한 것은 아니다. 3월16일 상품 중 매진된 것은 도서 외에 8만7천원짜리 프라이팬 세트뿐이었다). 회전율도 좋고 반품률도 높지 않다. 그러니 홈쇼핑에서도 도서 비중은 늘어나는 추세다. CJ홈쇼핑의 ㅇ과장에 따르면 도서 편성 비중이 2002년 일주일 2시간에서 현재 6시간으로 늘어났다. CJ홈쇼핑과 GS홈쇼핑 등 5개사 홈쇼핑의 2004년 도서 매출 규모는 1200억원, 2005년에는 그보다 늘어 1500억원 수준이다(한국출판연구소 추정 자료). 출판시장의 전체 규모는 2조8천억원(한국출판연구소 자료)이므로 홈쇼핑에서 전체 5%의 매출이 형성된 것이다. GS홈쇼핑 관계자는 2006년 도서 매출 확대를 25%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한번에 많은 물량을 소화하는 이점 외에 현금으로 거래한다는 점이 출판사를 홈쇼핑으로 유인하는 막강 요인이다. 불황 조짐을 보이는 도서 시장에 숨통을 틔워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홈쇼핑의 MD(구매담당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세트 구성력이다. ㄱ과장은 “단권은 안 된다. 10만원 수준, 최저 7만9천원으로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시리즈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청소년 시장, 특히 논술 관련 시장이 홈쇼핑에서 유리한 이유가 있다. 홈쇼핑은 어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홈쇼핑 판매를 의논했던 한 출판사의 부장은 “역사는 한물갔다. 위인은 이제 안 된다. 학부모의 트렌드가 있다. 지금의 코드는 논술, 과학, 철학, 고전이다”라는 말을 대놓고 듣기도 했다.

홈쇼핑의 MD는 공통적으로 “인지도는 점점 더 중요해진다. 고객의 정보량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퀄리티가 있는 상품을 구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객의 인지도가 높은 출판사의 도서인 경우는 전통적으로 중학생 이하 시장으로 통하던 홈쇼핑 규칙도 깨뜨렸다. 최근 홈쇼핑에는 ‘인지도가 높고 믿을 만한’ 문학 전문 출판사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2005년 1월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을 내놓았고, 이 단일 품목으로 한 해 5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CJ홈쇼핑 자료). 창비는 2005년 11월 ‘20세기 한국문학’ 2차분을 내면서 이 시리즈를 홈쇼핑에 내놓았다. 이렇게 대형 출판사가 홈쇼핑에서 창출하는 이익이 커지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세트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금력을 갖춘 대형 출판사와 1쇄를 500권 찍고 마는 인문학 출판사의 양극화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30~50% 할인율… 수수료는 35~38% 수준

홈쇼핑의 낮은 공급가와 높은 수익 분배 요구는 출판시장을 왜곡하는 구조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홈쇼핑에서 판매되는 도서는 30~50%의 할인율을 보이는데, 이는 공급가 할인이 문제가 되는 인터넷 서점보다 훨씬 낮다. 여기에 홈쇼핑에서 가져가는 수수료는 판매가의 35~38% 수준이다. 출판사는 정가 대비 40% 미만의 수입을 얻게 된다. 이것은 도·소매 공급가의 60~75% 수준에 한참이나 못 미친다. 홈쇼핑에 제품을 보냈던 어린이책 출판사의 팀장은 “이렇게 해서 무슨 이익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홈쇼핑에서 방송된 뒤 인지도가 높아진다는 이유에서 판매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전집 전문 출판사의 경우는 사실 정가의 의미가 없다. 할인율을 감안하고 정가를 매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점의 판매도 많은 대형 출판사에서 홈쇼핑을 중요한 유통경로로 삼는다면 정가 시장은 큰 혼란이 초래된다. 이미 인터넷 서점으로 인해 정가가 가뜩이나 과대포장됐다. 이제 가격을 믿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최신간 도서를 할인해서 팔 경우는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에 대한 가능성마저 보인다. 홈쇼핑에 판매되는 창비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할인율은 30%다(사은품 도서 가격 포함). 2003년 시행된 도서 정가제에 따르면 발간된 지 1년 미만의 도서는 최대 10%가 최고 할인율이므로 현행법 위반이기도 하다(과태료는 300만원).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하지만 교육에 나라 전체가 미쳐 날뛰는 왜곡된 구조에서 진심은 오해된다. 교육이 한 사람의 일생뿐 아니라 출판시장 전체를 흔들고 있다.


문학도서 전집시대

절판 위기에 몰렸다가 세트에 포함되며 성공적으로 부활

최근(발간일 2월26일) 출판사 열린책들은 ‘Mr. Know 세계문학’ 30권 세트를 서점에 풀었다. 리스트에는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 미치너의 <소설> 등 절판된 책과 함께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미의 이름>과 <개미> <뉴욕 삼부작>이 있다. 최근(2005년 12월)에 나온 E. M. 포스터 전집 중 한 종(<전망 좋은 방>)과 2005년 8월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줄리언 반즈 시리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포함됐다. 공상과학소설(SF)인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추리소설인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도 있다. 성격이 각기 다른 이 책들의 공통점이라곤 ‘열린책들이 판권을 보유한 책’이라는 점 외에는 없어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안톤 체호프, 프로이트 등 저자 중심의 ‘전집’만 있던 열린책들로서는 의외의 행보다.
이렇게 전집을 구성하는 것은 출판시장에서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책세상은 유동은 없지만 포장에 따라 재기를 노릴 수 있는 역작을 모아 메피스토 시리즈를 구성했고(2002년), 민음사도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등 유통기한이 다한 듯했던 책을 ‘세계문학전집’에 끼워넣어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절판됐거나 절판 위기에 몰린 책들이 세트에 포함되면, 견인차가 될 만한(책의 수요가 높은) 책이 응결핵이 되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지난해 한국문학에도 전집 붐이 일었다. 창비는 2005년 7월 22권 세트로 구성된 ‘20세기 한국소설’을 냈으며, 2005년 11월 여기에 14권을 보태 2차분을 구성했다. 문학과지성사도 2004년 12월 ‘한국문학전집’ 8권을 1차분으로 내고, 2월 23권의 황순원 소설선 <카인의 후예>까지 꾸준히 시리즈 책을 펴내고 있다. 민음사도 ‘오늘의 작가총서’를 2005년 10월 22권을 한꺼번에 펴낸 것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총 26권을 펴냈다.
굵직한 출판사 중 맨 처음 한국문학 전집을 선보인 문학과지성사는 ‘기획의 말’에서 “한국 문학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최근에 우리는 깊이 반성”했고 이 때늦은 반성을 전집을 “기획하는 힘으로 전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집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동력이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시장)에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각종 한국문학전집의 주요 ‘초대손님’은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들이다. ‘수능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책 말미의 ‘참고서식 덧붙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은 어려운 단어에는 주를 달아 해설하고, 작품의 의미를 짚는다(작품 해설). 그리고 작가 연보를 정리해 덧붙인다. 창비의 20세기 한국소설도 비슷하게 책 끝에 낱말풀이를 실었다. 그리고 현직 교사와 전문연구자들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붙였다. 여기에 전집과 홈쇼핑의 친화성도 무시 못할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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