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승리의 프로파간다’위해 붓을 든 북미 유명만화작가 프랭크 밀러
극도의 인종차별적 희화화로 ‘제2의 마호메트 만화’사건으로 번질 수도
▣ 김낙호 위스콘신대 언론학 박사과정
망토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만화 속 슈퍼 영웅들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이 딱 한 가지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슈퍼 영웅들과 맞서는 슈퍼 악당들이다. 영웅들은 설정이 아무리 황당하더라도 최소한 작품이 목표로 하는 독자 일반의 사회적 상식과 정의 추구라는 가치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물론 문화권마다 그 가치에 대한 차이는 상당하지만, 최소한의 공감대 정도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슈퍼 악당들은 다르다. 그들은 압도적인 힘과 출처가 불분명한 막강한 재력으로 동원한 여러 부하들을 데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지 모를 정도로 맹목적인 파괴활동을 일삼는다. 아무리 알고 보면 불쌍한 사연이 있다고 할지라도, 도저히 그 질서 파괴적 행동에 공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슈퍼 악당의 조건이다. 그렇기에 속시원하게 타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내년 출간 목표, 200쪽 중 120쪽 완료
만화, 그리고 만화와 종종 향유 계층을 공유하기 마련인 공상과학 또는 판타지 영화 등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 박람회 행사 ‘원더콘’이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향후 1년간 이쪽 업계를 크게 좌우할 대형 프로젝트들이 종종 베일을 벗는 공개 발표장소로 활용된다. 그런데 올해 원더콘 발표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것 중 하나가 바로 북미 주류 만화계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는 중인 작가 프랭크 밀러의 신작 제작 발표 소식이었다. 책의 제목은 바로 <holy terror batman>이다. 번역을 하자면 ‘이럴 수가, 테러라니! 배트맨!’이라는 뜻인데, 초창기 배트맨 만화의 홍보문구로 자주 쓰였던 표현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번에는 배트맨이 조우커나 캣우먼, 펭귄맨 같은 가상의 슈퍼 악당들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악명 높은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혼내준다는 게 이야기의 뼈대다. 작가는 발표장에서 이 작품이 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가져다주기 위한 본격적인 ‘프로파간다’가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또 출간은 내년에나 가능할 텐데, 지금까지 200쪽 가운데 120쪽의 선 그림을 끝낸 상태라고 밝혔다.
작품의 줄거리는 배트맨의 활동무대인 고담 시티(뉴욕시를 모델로 한 가상도시)에 알카에다가 주모한 테러가 일어나고, 배트맨이 그것을 막아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왜 자신의 작품세계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적 선전물을 자처해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인지, 작가의 대답은 분명하다. “슈퍼맨은 히틀러를 두들겨줬어요. 캡틴 아메리카도 그랬죠. 그게 그들의 당초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죠. 그들은 우리 국민, 우리나라의 상징입니다. 민속 영웅이라고요. 알카에다가 활보하고 다니는데 ‘리들러’나 뒤쫓고 있는 건 너무 바보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랭크 밀러는 1987년 <어둠의 기사의 귀환>이라는 작품을 통해 정체기에 빠져 있던 배트맨 시리즈에 완전히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인물이다. 당시 이 작품에서 그는 당대의 미국 현실을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두운 성격의 중년 배트맨을 창조해냈고, 이 작품의 히트는 이후 90년대에 슈퍼 영웅 캐릭터들의 현실적인 재해석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이 작품에서 밀러는 레이건 시대의 비합리적인 보수성과 관료적 국가 통제를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연방 정부기관의 하수인이 돼 있는 슈퍼맨과의 대결에서 이런 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부패한 관료 시스템이 제대로 통제해주지 못하는 악의 세력이 뒷골목에 넘치는데, 강고한 완력을 지닌 영웅이 그 상황을 직접 하나씩 타파해나간다는 ‘자경단’ 정신은 이후 <신시티> 연작 등을 통해서도 더욱 공고하게 다져진 프랭크 밀러의 핵심 정서다. 특히 지구촌은 물론 나아가 우주까지도 보호하는 절대적인 영웅인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은 고담 시티라는 ‘자신의 동네’를 지키는 존재이기에 자경단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테러가 어디에서나 일어나 당신의 일상을 덮칠 수 있고, 정부는 그것을 제대로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는 불안감이 꿈틀대고 있는 9·11 이후의 미국에서, 이런 정서는 더욱 많은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 슈퍼영웅 만화의 교훈
사실 슈퍼 영웅이 현실세계의 악당을 혼내준다는 내용의 작품들은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 슈퍼 영웅들이 히틀러와 일본군을 문자 그대로 열심히 두들겨 패줬다.
뿐만 아니라 만화책을 좋아하는 남녀노소를 대상으로 전쟁 후원금 모금운동까지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기본적인 구도는 압도적인 초능력과 힘을 지닌 슈퍼 영웅이 왜소하고 사악하게 묘사된 히틀러와 일본군들을 무찌르는 모습으로, 굳이 분석적으로 들어갈 것도 없이 극명한 상징을 보여주려는 프로파간다였다. 사실 영화나 다른 대중매체에서도 이런 사례들이 넘쳐나지만, 특히 만화는 희화화와 과장에서 워낙 자유로운 표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아가 당시 가장 ‘대중적인 오락’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돋보였던 것이다. 자유로운 표현력과 대중성이라는 만화의 장점이, 오히려 만화가 선전도구로 악용되도록 하는 요소로 작용한 셈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정치 홍보성 슈퍼 영웅 만화들의 사례에서는, 선악 구도를 최대화하기 위해서 극도의 인종 차별적 희화화가 성행했다. ‘우리’의 결속을 위해, ‘남’들의 존엄은 가볍게 무시되고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오는 여러 문제점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당시 사회의 일방적 잣대를 적용한, 표현의 자유라는 덕목으로 가볍게 덮어버리곤 했다. 비록 슈퍼 영웅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한-일간의 <혐한류>나 <혐일류> 만화책 출간이라든지, 점점 더 파국을 향해 확대되고 있는 마호메트 만화 파문 역시 같은 맥락이다. 표현의 자유가 ‘타자’를 공격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을 과연 진지하게 책임질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이 부족한 것인지에 대한 극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프랭크 밀러가 그려내는, 알카에다를 혼내주는 배트맨의 모험이 과연 어느 정도의 표현 수위를 지니고 있을지 아직 섣부르게 예단할 수 없다. 혹시 정치적 공정성이 사려 깊게 배치돼 있으면서, 슈퍼 영웅 장르의 현실성을 또 한 번 재발명하는 걸작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미국 보수층이 지닌 타 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무지를 고려해볼 때, 그다지 전망이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내년 이맘때, 이 작품이 ‘제2의 마호메트 만화’ 사건으로 번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ho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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