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작가가 된 사대부의 궁중 밀회가 가르쳐준 세 가지
조선후기 시대극은 대통령제와 인터넷 문화를 풍자한다?
▣ 황진미 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작가의 탄생’을 통해 근대적 작가란 어떤 존재인지를 리얼하게 그려보인 풍속극이자, 궁정풍 연애를 다룬 시대극인 동시에, 현재의 인터넷 문화를 되비추는 풍자극이다. 위의 세 가지 면모를 세 가지 질문과 더불어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그는 왜 하루아침에 포르노 작가가 되었나?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과 서채를 자랑하는 문사이자, 서화에 안목이 높은 예술애호가에다 상상력 또한 상당하다(“그렇게 상상력이 없어서야…”). 게다가 정치권력엔 관심이 없으며(“‘대의’가 뭔지?”), 가문이나 신분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는 ‘개인주의자’이다. (또한 ‘언문’을 읽고 쓸 줄 안다. 당시 사대부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불타는 창작욕, 근대적 작가의 탄생
그의 이러한 자질들은 사대부로서는 부적합한 것이지만, ‘대중작가’에게 요구되는 필요충분조건에 정확히 일치한다. 말하자면 그는 ‘내추럴 본 작가’였다. 그는 대중소설이라는 존재(‘야한 책’ 자체만이 아니라, 독자와 만나는 배급과 유통의 질서)를 목격하고 흥분에 사로잡힌다. 드디어 완전히 적성에 맞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가로서 창작욕이 높을 뿐 아니라, 자신의 창작물이 어떻게 읽히고 평가되는지 궁금해하며, 작품에 대한 반응을 즐긴다. 또한 ‘작가’라는 직함과(“작가라…”) 창작자의 위치를(“글을 쓰는 것은 나요”) 자랑스러워하며, 동시대의 독자들과 소통한다는 데에 대단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따라서 그는 ‘음욕’이 대단해서라기보다, 주체할 수 없는 글쓰기의 욕구와 대중과 교감하고픈 소통의 욕구 때문에 포르노 작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당시 잘나가는 대중소설의 장르가 다양했더라면 탐정물이나 무협물을 썼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는 독자와 섹스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둘째, 정빈은 왜 목숨을 건 불장난을 하게 되었나? 정빈은 아마도 반대 당파의 인물로 그에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사건을 맡긴 것 같다. 표면적으론 그가 해결한 것이나, (정빈의 당파에 속하는) 의금부도사가 주도해 해결한 것임을 아는 정빈이, 그를 불러 ‘비겁자’라 놀린다. 그때 자신에게 다가와 벌을 쫓는 과감한 행동을 보인 그에게 그녀는 ‘요것 봐라?’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성적 매력과 우월적 지위를 확신하며, ‘너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왕의 여자인 나를 감히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이중의 구속을 안긴다. 이는 흡사 서양 궁정 연애소설의 ‘영주의 아내’ 혹은 누아르물의 ‘보스의 애인’을 연상시킨다. 유혹의 패를 던지면서, ‘나를 가질 용기가 있어?’라고 시험하는 그녀. 그런데 의외로 그가 시험을 용기 있게 받아들인다. 마침내 밀회에까지 이르고, 두 번째 밀회에선 (스스로의 소설적 상상에 의해 고무되고, 또한 작품을 위해 용기가 필요했던) 그와 섹스하게 된다. 이쯤에선 정빈도 게임이라 여겼던 애초의 생각에서 진지해지며, 의외로 용기 있는 자와 짜릿한 로맨스를 즐겼다는 흥분에 새삼 봄향을 느낄 만큼 상기된다. 그러나 그의 감정이 거짓이었으며, (100% 매력을 확신하던) 자신이 오히려 냉철한 상대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격분한다.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실’이라는 구차한 한마디를 구걸하며 그녀는 그를 고문하고, 마침내 왕과 함께 명목과 진실이 따로 도는 3자 대면의 재판을 하기에 이른다. 왕은 ‘가면의 재판’이 주는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리고, 자신이 가장 인정하기 싫은 ‘둘의 관계’를 자신의 입으로 구술한다. 왕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가면은 필요 없다. 정빈 역시 자신이 가장 인정하기 싫은 ‘짝사랑이었음’을 고백한다. 마침내 그도 자신이 가장 인정하기 싫은 ‘나도 나를 잘 모르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정빈에 대한 욕망이 성욕인지, 사랑인지, 또는 소설을 쓰려는 욕망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구분될 필요가 없다. 정빈의 ‘게임의 욕망’과 나르시시즘과 사랑이 결국 혼융돼버렸듯이, 그의 ‘소설의 욕망’이 곧 음욕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국가권력의 엄숙함을 비웃다
셋째, 영화가 말하고자 함은 결국 무엇인가? 이 영화는 어쩌면 70년대 인기를 누렸던 TBC <고전유모어극장> 스크린편이라 할 수 있다. 사극의 형식을 갖췄지만 과거사와는 무관하며, 현재의 이야기를 고전극의 형태를 빌려 비추는 (역)패로디다. 조선 후기 때 음란소설이 얼마나 유통되었나, 또는 내명부가 궐 밖의 남자와 밀회한다는 게 가능한가 등의 질문은 하등 중요치 않다. 사헌부와 의금부라는 최고위 사법기관의 관리들이 정파와 관계없이 만나 음란서적을 만들고, 왕의 여자가 포르노 모델이 되는 상상의 지평은 결국 조선 사회를 풍자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국가권력의 엄숙함을 조롱하기 위함이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치환한 <조선남녀상열지사-스캔들>의 조선 상류사회 비틀기가, 풍자의 대상에 왕까지 포함해 확대시킨 <왕의 남자>에 이르자, 극중 왕정을 현 대통령제의 유비로 읽는 것까지 자연스러워졌다. 사극을 통한 국민국가적 상상의 지평이 열린 것이다. 여기에 <음란서생>은 ‘댓글’ ‘동영상’ 등 현대생활백서를 사극 속에 무람없이 빚어넣는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음란한 소설을 쓰고 읽는 욕구’는, “200~300년 뒤 제목도 더 ‘음란’해진” 영화들을 만들고 보고 댓글 다는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마치 감독이 돌아앉아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고, 그 거울에 관객의 얼굴이 비춰지는 꼴이다.
P.S. 그런 의미에서 구강성교와 궁중비사 등 갈 데까지 간 이성애 포르노가 마침내 동성애와 가학-피학증으로 귀착되고 그 제목이 ‘친구’라는 설정은, 남자들 간의 우정과 의리를 담았다는 영화 <친구>가 실은 지극히 동성사회적(homosocial)이며 가학-피학적인 섹슈얼리티를 지녔다고 풍자한 것으로, 가히 영화 속 최고의 유머로 꼽힐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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